[이철호의 시시각각] 무서운 중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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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우리 기업들이 중국 신문을 읽는 시각은 색다르다. 휴일인 지난 16일, 중국 권력 서열 2위인 우방궈 정치국 상무위원이 하이닉스반도체의 장쑤성 우시(無錫)공장을 방문했다. 이미 원자바오 총리 등 9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 5명이 우시공장을 방문했다. 대단히 자랑스러운 장면이다. 그러나 국내 업체들은 소름 돋친 표정이다. 중국이 반도체까지 본격적으로 넘보는 신호탄으로 보는 것이다. LCD의 쓰라린 기억 때문이다.

5~6년 전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들은 한국의 LCD 공장을 자주 찾았다. 곧 야심을 드러냈다. 현지에서 생산하는 LCD에는 파격적인 혜택을 주고, 완제품 수입에는 관세를 올리겠다고 압박했다. 세계 최대의 LCD TV 시장인 중국을 포기할 업체는 없었다. 중국 공산당의 상술도 예술이었다. 한국 LCD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중국의 10여 개 성이 혈투를 벌였다. 그러자 슬그머니 중국 정부가 끼어들어 가장 낮은 지원금을 약속한 2개 성만 후보지로 허용했다. 모든 게 흥정 대상이었다. 기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정부에는 LCD 기술 유출을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중국 정부엔 더 많은 기술 이전을 약속해야 하는 샌드위치 신세였어요.”

요즘처럼 중국이 세계적인 존재감을 과시한 때는 없다. 경기과열을 식히느라 지급준비율을 올리고 일부 은행들의 부동산 대출을 죄자 전 세계 증시가 곤두박질했다. “우리를 G2라고 치켜세우는 것은 중국을 띄워 죽이려는 서방의 음모”라는 중국 언론의 보도는 눈앞의 현실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중국이 동원한 경기 억제 수단도 노련하다. 지준율을 높여 통화량을 직접 규제한 것이다. 중국 경제는 금리보다 통화량을 조절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고, 금리를 올리면 위안화 평가절상 압력이 거세질 수 있다는 점을 중국 정부는 간파하고 있다.

현재로선 중국을 견제할 수단은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위안화 절상 압력은 소강상태에 빠졌고, 구글은 중국 정부를 이기지 못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외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현지 법을 따르는 것이 전제조건”이라며 구글을 비난했다. 3년 전 중국산 바비 인형의 납 성분 때문에 한판 붙었던 미국의 마텔도 “우리가 디자인을 잘못해 납이 들어갔다”며 중국 정부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 당분간 중국의 압박적인 산업정책은 제동이 걸리지 않을 듯싶다.

한·중 수교 이후 우리 기업들이 중국 특수를 누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위상의 변화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한때 반도체·자동차 공장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던 중국 산업시찰단들이 요즘 “우리나라에 없는 것만 보여달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렇다고 새로운 첨단산업은 쉽지 않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보안을 내세워 대체에너지·바이오·기초소재 등 차세대 핵심 연구소에는 한국 출신 연구원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리고도 삼성전자 최고경영진이 웃지 않는 이유다.

5000년의 역사상 중국의 무게를 별로 의식하지 않았던 지난 20년은 특별한 공간으로 남게 됐다. 중국발 태풍은 지구적 범위에서 위력을 더하고 있다. 앞으로 숱한 첨단 공장들이 중국으로 옮기고, 협력업체들이 따라가고, 더 많은 국내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게 분명하다. 그때는 설 연휴를 마치고 돌아오려 해도 복귀하지 못하는 근로자가 얼마나 될지 모른다. 중국의 부상이라는 세기사적인 변화는 우리 기업들만 떠맡기에는 너무 큰 숙제다.

이철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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