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친절경영 배워 모국에 전할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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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롯데백화점 외국인 사원들이 서울 소공동 본점 남성캐주얼 매장에 모였다. 왼쪽부터 왕스·왕옌·쿠마르아지트. 이들을 포함해 롯데백화점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는 외국인 직원은 17명(2009년 12월 기준)이다. [롯데백화점 제공]

‘한국전쟁 참전 여단장의 손자, 인도 브라만 계급의 후예, 중국 최고 학부 출신 변호사…’.

이들은 모두 롯데백화점에서 일하는 외국인 직원들이다. 상사나 전자업체에선 외국인 직원들이 흔히 눈에 띄지만 전형적인 내수산업인 유통업에 외국인들이 일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롯데백화점은 2018년까지 ‘글로벌 톱10 유통기업’이 된다는 비전 아래 외국인 직원을 꾸준히 채용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러시아·베트남 진출에 대비해 현지 우수인력을 선점하기 위한 포석이다. 이 회사는 해외 매장을 3개에서 2018년까지 7개로 늘릴 계획이다.

본점 해외사업부문 왕스(王石·30)는 롯데그룹 최초의 정규직 외국인 직원이다. 그는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의 조부는 한국전에 여단장으로 참전했다. 그는 중국 산둥(山東)대를 졸업하고 상하이(上海)의 부동산관리 담당 공무원으로 잠시 일했다. 미래가 보장돼 있는 자리였지만 역동적인 삶을 원하는 그는 갈증을 느꼈다. 대학에서 친하게 지내던 한국 유학생들이 한국행을 권했다. 부모도 한국행을 반겼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과는 삼대에 걸친 인연이 있다. 열심히 일해 한국과 중국의 가교가 돼라”고 격려했다. 2004년 말 한국에 와 연세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땄다. 한국 소비자를 더 잘 알고 싶다는 생각에 2006년 말 롯데백화점 신입사원 공채에 지원했다. 외국인을 위한 별도의 전형 절차도 없던 시절이었다.

인도 카스트 최고 계급인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난 쿠마르아지트(32)는 2008년 8월 이 회사에 입사해 본점 남성스포츠팀에서 근무 중이다. 외모는 한눈에 봐도 외국인이지만 고객 불만을 처리하는 영업업무를 맡았다. 유창한 한국말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력을 부서장들이 높이 산 결과였다. 그는 일찌감치 한국행을 결정했다. 고향은 인도 비하르주(州) 보드가야. 싯다르타 왕자가 깊은 명상 끝에 득도해 부처(석가모니)가 된 불교 성지다. 해마다 이곳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을 보면서 ‘꼭 한국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키웠다. 인도 최고 명문 중 하나인 네루대에서 한국어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인도의 ‘실리콘 밸리’로 불리는 벵갈루루에서 외국계 회사 컨설턴트로 근무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장이었지만 그만두고 자비를 들여 2004년 서울대 국제지역대학원에 입학했다. 학비는 방학 중 인도 현지로 돌아가 관광객 가이드를 하며 벌었다. 2008년 대학원 졸업 후엔 한국 사람과 더 많이 접하고 싶어 백화점을 직장으로 선택했다.

지난해 8월 이 회사의 식구가 된 왕옌(王艶·27·여)은 명문 중국 칭화(淸華)대 법학과 출신이다. 대학원 진학과 한국 기업 입사를 두고 고민하다 한국행을 결정했다. 요새 소공동 본점에서 직무 교육을 받는 중이다.

외국인 직원이 드문 유통업계에서 일하는 만큼 에피소드도 많다. 쿠마르아지트는 “상품이나 서비스에 불만을 제기하던 한국인 고객들도 제가 능숙한 한국말로 ‘어떤 걸 도와드릴까요’라고 물으며 다가서면 이내 풀어진다”고 웃으며 말했다.

물론 어려움도 많다. 입사 초엔 직원 간 엄격한 위계질서 등 한국 사무실 분위기를 잘 몰라 실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눈치 없이 고참 직원보다 먼저 퇴근하다가 눈총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처음엔 한국 직장생활이 어색했지만 이젠 한국사람이 다 된 것 같다”며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퇴근하는 고국 친구들을 보면 이젠 이해가 안 갈 정도”라고 입을 모았다. 경력과 국적은 달라도 이들에겐 한 가지 꿈이 있다. 한국 유통기업에서 배운 경영기법을 모국에 전파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수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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