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Q 200짜리 말하는 토끼, 현대사를 조롱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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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소설가 김남일씨가 15년 만에 낸 『천재토끼 차상문』은 풍자소설이다. 20세기 후반 한국사회를 유쾌하게 헤집는다. 작가는 친환경 생태주의도 이데올로기로 굳어지면 곤란하다고 말한다. [박종근 기자]

‘궁하면 통한다’(窮則通)고 했다. 새 장편 『천재토끼 차상문』(문학동네)을 펴낸 소설가 김남일(53)씨를 만나 얘기를 듣다 보니 그런 생각이 퍼뜩 스쳤다.

종합하면, 김씨는 경제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스스로 불우하다고 여겼다. 통장 잔고는 수시로 불안했다. 소설 쓸 곳을 찾아 지리산 섬진강변이나 강원도 홍천의 빈 농가 등을 몇 년씩 전전했다. 김씨는 5공 시절 문예 계간지 ‘문학과지성’이 폐간 당하자 발행된 무크지 ‘우리 세대의 문학’을 통해 1983년 등단했다. 하지만 이후 발표한 작품은 주제나 소재 면에서 아무래도 창비 쪽이었다. 언제부턴가 그에게는 ‘노동문제에 천착한 작가’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2008년 겨울, 김씨는 구들장이 무너져 난방이 안 되고, 뚫어진 창호지 구멍으로 칼바람이 들이치는 홍천의 농가주택 안에 앉아 있었다. 등산용 침낭을 뒤집어 쓴 채였다. “눈물 날 정도로 30년 가까이 소설만 쓰는 동안 나이는 쉰이 넘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사나”하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고 한다.

“결국 갈 길은 소설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영장류 토끼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써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한 달 반 정도 정신없이 썼다. “엄격한 리얼리즘의 규율에서 벗어나 상상력에 숨통을 틔우자 소설 쓰기에 탄력이 붙었다”고 한다. 글쓰기가 재미있어 추운 줄도 몰랐다.

이제, 소설 얘기다. 알아차리셨겠지만 소설은 사람처럼 말을 하고 사랑도 아는 영장류 토끼(학명이 레푸스 사피엔스란다)가 주인공인 별난 소설이다. 무엇보다 구렁이 담 넘듯 천연덕스럽게 몇 십 줄씩이라도 이어지는 이야기가 매력적이다. 별 관계 없이 보이는 항목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처음 시작이 뭐였는지 종종 어리둥절해진다.

가령 주인공인 천재토끼 차상문(IQ가 200이 넘는다)의 미국 유학시절 한국에서 발효된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미국 법 조항을 줄줄이 소개한다. 알래스카에서는 곰을 총으로 쏴 잡는 건 괜찮지만 사진촬영을 위해 잠 깨우면 불법이라는 법 같은, 유신체제에 대한 에두른 조롱이다.

수위 높은 농담도 있다. 미국인 친구 밥으로부터 자위하는 법을 배워 성에 눈뜨는 차상문, 중얼거린다. “전쟁을 일으키기 전 교전 당사국 대표단이 나란히 앉아 이걸 한 번씩만 하면 싸우고 싶은 욕심이 꽤 사라질 텐데 말이야.” 결국 역사에 기록되는 끔찍한 전쟁도 남성들의 성에너지(리비도) 과잉 때문인 것은 아닌지 헷갈린다.

소설은 1950년대 중·후반부터 금세기까지 차상문의 일대기를 따라간다. 유신, 베트남전, 87년 민주 항쟁, 90년대 초 분신정국 등 한국 현대사가 배경으로 깔린다. 60년대 히피문화, 70년대 반전시위 등 미국의 현대사에도 한 발 걸친다. 특유의 웃음 코드로 지난 수 십 년 정치문화사를 꿰차는 강력한 풍자소설이다.

김씨는 “직선적인 발전이 과연 옳은 것인지 생각해보자는 게 소설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런 메시지는 ‘쿵!쿵!쿵!’ 땅을 울리는 이명(耳鳴)에 괴로워하는 차상문의 증상으로 집약된다. 소설은 둥글면서도 날카롭다. 궁한 김씨는 통한 것 같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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