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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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5. 낯선 문화생활

유학 당시 우리는 말 그대로 촌놈이었다. 55년 우리 일행을 태운 비행기는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를 경유해 시애틀에 잠깐 기착했다.

지금처럼 논스톱으로 미니애폴리스까지 가는 비행기는 없었다. 공항에 도착해보니 칠흑같이 깜깜한 밤이었는데 미국무성 관계자들이 나와 우리를 인근 호텔로 안내했다.

호텔에 도착한 우리가 가장 놀란 것은 욕실의 수도꼭지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이었다.

수도물은 항상 차가운 것이라야하는데 웬일인가 싶었다. 처음엔 불이 난 것이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다.

나중에야 목욕을 위한 온수란 사실을 알고 우리의 무지에 부끄러워했다. 하긴 당시 서울에선 변변한 상수도조차 없던 시절이 아닌가.

일행중 마취과 조교인 이동식은 이 장면이 놀라운지 연신 수도꼭지에 대고 카메라 셔터를 터뜨리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 자고 일어난 우리를 또 한번 놀라게 한 것은 호텔 앞에 늘어서 있던 자동차의 행렬이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뷰익자동차인데 세상에 그렇게 호화롭고 큰 차는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몇 십대가 줄지어 서 있다니 정말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말로만 듣던 TV와 전화기도 호텔에서 처음 목격했다. 폐허의 땅 한국에서 온 나는 한편으론 기가 죽었지만 낯선 이국 땅에서 마치 신천지에 도착한 들뜬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놀라운 일들은 미국에 도착한 지 한참 지나서도 계속되었다. 미네소타도 한여름 날씨는 무척 더웠다.

그런데 미네소타대학병원 안은 얼음처럼 시원한 것이 아닌가. 에어컨의 위력을 이때 처음 실감했다. 일반가정과 공공기관 어디서든 에어컨이라곤 전무했던 국내실정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할부제도도 처음 경험했다. 한번은 미니애폴리스 시내에서 양복을 사려고 하는데 한벌에 30달러나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준비해간 돈은 10달러 남짓이므로 나가려고 하는데 점원이 불러세우며 지금 구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3차례에 걸쳐 10달러씩 나눠 내면 된다는 그의 설명을 한참만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미네소타대학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모두 기숙사에 들어갔다. 경비는 전액 미국정부에서 지원했다.

교수는 2백40달러를 받았지만 나같은 조교는 한달 1백80달러의 급여를 받았다. 그러나 기숙사비가 1백10달러였으므로 70달러로 한달을 살아야 했다.

당시 말보로 담배 한갑이 10센트였으며 한달 쌀값이 15달러 정도였으니 이 돈도 결코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풍족한 편도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1년이 못돼 모두 값비싼 기숙사에서 뛰쳐나와 자취를 하게 된다. 당시 민간인의 집에 세들어 사는 자취비용은 한달 30달러면 충분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서너달 돈을 저축했다 날을 정해 한꺼번에 시내쇼핑을 나가 필요한 물품을 사곤 했다.

우리는 신체검사와 지능검사 등 소정의 절차를 마친 뒤 9월부터 석사과정에 입학해 미국유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국 북동부에 위치한 미네소타주는 우리나라와 기후가 비슷해 날씨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낯선 문화가 문제였다. 우선 음식이 맞지 않았다. 기숙사에선 매일 아침 버터빠른 빵과 계란 일색이었다.

나는 특히 고생을 했다. 아침만 먹으면 늘 속이 부글부글 끓는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그래서 버터바른 빵 대신 항상 과일쥬스와 계란만으로 아침식사를 때웠다.

다행히 저녁엔 스파게티나 감자 위주 요리, 핫도그 등을 내놓았는데 그런대로 먹을만 했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식사도 맞지 않는데 이제부터 백인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시작해야한다니 정말 갑갑하기만 했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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