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최영미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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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새침 떨어볼까요 청승 부려볼까요

처맨 손 어디 둘 곳 몰라

찻잔을 쥘까요 무릎 위에 단정히 놓을까요

은근히 내리깔까요 슬쩍 훔쳐볼까요

들쑥날쑥 끓는 속 어디 맬 곳 몰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슴 속 뒤져보면

그래도 어딘가 남아 있을, 잡초 우거진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에 그대, 들어오겠나요

어느 날 문득 소나기 밑을 젖어보겠나요

잘 달인 추억 한술

취해서 꾸벅이는 밤

너에게로, 너의 정지된 어깨 너머로

잠수해 들어가고픈

- 최영미(39)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 중

우리나라에는 비무장지대가 있다. 그 비무장지대를 지키기 위해 철조망을 치고 지뢰를 묻고 병사들은 중무장을 하고 밤낮없이 불침번을 선다. 최영미의 마음에도 비무장지대가 있다. 철조망도 지뢰도 없어 그대 들어올 수 있게 문 열려 있는. 커피나 홍차 한 잔을 손에 들고 둘 곳 모르는 마음의 빈터를 시로 잘도 채워 놓는다. 아주 평화스럽게, 다칠 위험도 없게.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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