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선후보 첫 TV토론] 여론·평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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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미국 대선 후보로 나선 민주당 앨 고어 부통령과 공화당 조지 W 부시 텍사스 주지사가 3일 보스턴 매사추세츠대학에서 열린 TV토론회에서 처음으로 맞붙었다. 두 사람은 1992년 이후 처음 만났는데 그게 토론회장이 된 것이다.

정치 평론가들은 대선 TV토론회를 '세상에서 가장 격렬하고 대통령직이 포상으로 주어지는 웅변대회' 에 비유한다.

그것을 입증하듯 두 후보는 1시간30분 동안 숨돌릴 틈 없는 공방을 벌였다. 토론회가 끝난 뒤 실시된 긴급 여론조사 결과는 전반적으로 고어가 잘했다는 쪽이었다.

CBS방송이 유권자 8백12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선 '고어가 이겼다' 가 56%였으며 부시는 42%에 그쳤다.

CNN.갤럽.USA투데이의 합동 조사에서는 고어가 앞섰지만 48%대 41%였고 ABC방송 조사는 차이가 더 줄어들어 42%대 39%였다. 유권자들은 고어의 손을 반쯤 들어준 셈이다.

첫 토론회의 특징은 큰 이변이 없었다는 것이다. 고어는 '최고의 언변가' 란 평가에 걸맞게 낭랑한 목소리와 당당한 자신감으로 판을 리드했다.

그는 구체적인 예를 들고, 숫자들을 나열해가며 자신이 각종 이슈들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고어는 아주 치밀하게 짜여진 몇가지 토론 기법도 선보였다.

그는 대화 도중 "여러분이 나를 대통령으로 밀어준다면" 이라는 똑같은 표현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부시 후보는 미국 최고 부자들 1%의 이익을 반영한다" 는 얘기는 무려 열 차례 가까이 되풀이 했다.

이는 시청자의 무의식을 파고들려는 기법이다. 고어 후보는 또 민주당 전당대회 때 재미를 봤던 대목을 이번 토론회에서 다시 써먹었다.

그는 "나는 내 스스로 이 자리에 섰다" "피땀흘려 일하고 세금내는 중산층을 위해, 그들의 대변자로 싸우겠다" 고 말했다. 둘 다 전당대회 때 썼던 표현이다.

이와 함께 고어 후보는 강력한 도전자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클린턴만 졸졸 따라다녔고 리더십이 부족하다" 는 부정적 평가를 떨쳐 버렸다는 평가다.

공화당의 부시 후보도 손해만 본 것은 아니다. 부시측은 무엇보다 토론의 귀재라는 고어와 맞상대하면서도 눈에 띄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돼 있다.

미국 언론들은 "부시가 말더듬이(bumbler)는 아니란 사실을 입증했다" 고 보도했다. 부시는 더구나 "고어가 인터넷뿐만 아니라 계산기도 만들어 낸 것 같다.

엉터리 산수를 하고 있다" 며 조크를 섞어 역공을 펴기도 했다. 어차피 부시의 토론 솜씨는 형편없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는데 이 정도면 앞으로 남은 두번의 토론도 해볼만하다는 것이다.

부시와 고어의 참모들은 11일 이뤄지는 두번째 토론 때까지 이날의 토론을 면밀히 분석해 상대방을 일거에 쓰러뜨릴 묘안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걸 발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반 유권자가 직접 질문하는(타운미팅 방식) 17일의 마지막 토론이 좀 더 볼만하겠지만 그 역시 첫번째 토론회 수준을 넘어설지는 미지수다.

김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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