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거진 대만판 '율곡비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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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대만판 '율곡 비리' 로 대만 정국이 난기류에 빠졌다. 국민당 정권시절 저질러진 거액의 군함도입 비리가 다시 불거져 여야 모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수사결과에 따라선 국민당 정권에 대한 과거청산작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대만.홍콩언론들은 이 사건을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어 국민당과 사실상 연립정부로 출범한 천수이볜(陳水扁) 정권은 벌통을 건드린 게 아니냐며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 발단〓1993년 12월 10일, 최신예 해측함(海測艦).순양함.전투함 등 '차세대 함정' 도입을 책임진 해군 총사령부 무기획득실(무획실)집행장 인칭펑(尹淸楓)대령이 실종 하루만에 타이베이(臺北)시 남쪽 쑤아오(蘇澳)해변에서 시체로 떠올랐다.

경찰은 이를 익사로 처리했으나 유족들이 반발, 부검을 했다. 부검 결과 尹대령이 타살된 뒤 바다에 버려진 것으로 밝혀지면서 군수비리 때문이란 의혹이 불거졌다.

미망인 리메이쿠이(李美葵)는 "남편이 군비리를 폭로하려다 살해됐다" 고 주장하고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으나 검찰은 개인 원한에 의한 사건으로 몰고간 뒤 미제사건으로 처리했다.

6년이 지나 국민당 정권이 무너지고 陳총통이 취임하자 미망인 李는 재수사를 촉구하는 탄원서를 지난 7월 제출했다.

대만 언론들도 새 정권에 재수사를 촉구하고 나섰고, 지식인 등 여론 주도층도 압박을 높였다.

여론의 압박에 밀린 陳총통은 지난달 기자회견을 갖고 "尹집행장 의문사 사건은 반드시 규명돼야 할 사안이다.

尹대령의 영혼이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나를 총통에 당선시킨 것 같다" 고 말해 수사가 급진전됐다.

◇ 경과=대만 군 수사대 '1209 특별수사반(尹대령사건 전담수사반)' 은 8월 초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수사 결과 尹대령은 실종 직전 무기도입과정을 세밀히 챙기는 자신에 대한 음해공작 증거를 입수하고 93년 12월 8일 핵심 무기거래상 몇명의 사무실에 비밀녹취장치를 설치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 녹음테이프는 尹대령의 비서 왕완잉(王萬瑩)이 보관하다 尹대령 시신이 발견된 직후 尹대령 직속 상관인 무획실 주임 리쿤차이(李崑才)소장 손을 거쳐 우룽장(吳榮章)군 검찰관에게 인계됐다. 그러나 93년 12월 31일 공개된 문제의 녹음테이프는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 사건 내용=사건의 핵심은 무기도입 실무총책인 尹대령이 무기중개상과 군 고위 관계자간의 부정행위를 폭로하려다 살해됐을 가능성에 있다.

롤랑 뒤마 전(前)프랑스 외무장관의 측근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대만 해군이 함정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약 2백억 신타이비(新臺幣.약7천5백억원)의 리베이트를 챙겼으며 대만 총통부, 프랑스 엘리제궁 등이 균등하게 돈을 나눠가졌다" 고 주장했다.

결국 尹대령은 이 거대한 부정사건의 일단을 파헤치려다 희생당한 것으로 특별수사반은 판단하고 있다.

◇ 파장=우스원(伍世文)현 국방장관과 좡밍야오(莊銘耀)국안회 비서장도 당시 부총참모총장과 해군총사령관으로 군수업무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총통부의 고위 관계자도 조사 대상이다. 만일 이들의 연루 혐의가 드러날 경우 사건은 일파만파로 확산될 수밖에 없다.

특별수사반 관계자는 "사건 파장이 지난 정권 핵심부로 확산될 공산이 크다" 고 말하고 있다.

홍콩=진세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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