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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어떤 고향 찾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올해 추석은 철이 일러 오곡백과가 풍성한 계절의 향연을 즐기기 어렵겠지만 1천만명 이상의 인구가 심한 교통체증을 겪을 각오를 하고도 고향을 찾아 나설 것이다. 고향이 무엇이길래 우리에게 고통을 감내하게 하는가.

이미 고향을 찾아 떠난 사람들도 있다.

9월 2일 비전향 장기수 63명(간첩 49명, 빨치산 14명)이 판문점을 거쳐 북쪽으로 넘어갔다.

대부분이 70대 이상 노인(48명)이고 남한출신(43명)인 데도 그들의 고향, 그들의 '천국' 을 찾아갔다.

오래 전 흔히 스웨덴 국왕에게 출전의 영예가 돌려지는 말이 생각난다.

"20대에 공산주의에 빠지지 않으면 정열이 없는 사람이고, 30대에 사회주의에 심취하지 않으면 사회정의에 둔감한 사람이지만, 40대가 지나서도 자본주의 장점을 모르면 현실에 어두운 비이성적 인간" 이라고.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기탁하려 출생지도 아닌 평양을 고향으로 알고 찾아 나선 이들에게 젊은 시절의 정열이 아직도 뜨거워 공산체제 실패의 현실을 못 보게 눈을 가렸는가.

아니, 우리는 그들의 마음에 번민의 그늘이 짙게 드리운 것을 감지한다.

비전향의 고집에서 이념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확신보다 자기 인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입증하려는 치열한 몸부림이 엿보인다.

평양에서 받을 짧은 낮의 환대 뒤에 천국의 실상이 몰고 올 긴 밤의 회한이 예정돼 있다.

그들이 받은 꽃다발 대신 '고향' 주민에게 떠맡길 선물은 그들 '따라 배우기' 를 강요당할 북쪽 동포들의 학습과 노동강요일 것이다.

냉전시대 첩보영화에서 동서 베를린을 연결하는 다리 서쪽 끝 찰리 체크 포인트에서 간첩을 넘기면 동시에 동쪽 끝에서 우방 정보원이 넘어오는 장면을 보아왔다.

며칠 전 판문점 교환은 일방적이었다. 이제 북측에서 국군포로와 납북어부를 송환할 차례다. 생포 인원이 아직 상당수일 것으로 추정된다.

대통령 담화에서 언급된 8백여명이 하한선일 것이다.

이들의 송환을 요구해야 대한민국도 국민에게 국방의무를 지우는 나라로서 체면이 선다. 종전 이후 전사자의 유해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는 선진국 수준까지는 멀었다치자. 생존 포로들의 송환은 필수과제다.

또 하나의 한국적 고향찾기가 있다. 오래 전 해외입양 됐던 한국태생들이 부모를 찾아오는 서울 방문이 늘고 있다. 한국은 베이비 수출 1위 국가라고 한다.

동란 이후 약 14만3천여명의 유아들이 해외 입양됐다. 살림이 어려웠던 시절이라면 몰라도 세계 11위 수준의 경제규모에 오른 요즘에도 유아수출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번 남북가족 상봉에서 보인 눈물의 바다, 크고 작은 사고 사망 때 유가족의 오열, 성묘 길 민족 대이동 등 한국인의 요란한 가족사랑의 뒷면에는 이 같은 치부가 숨어 있다.

우리의 가족사랑은 선별적이다. 한때 추리작가로 세계적 명성을 떨쳤던 애거사 크리스티가 "범죄는 가족간에 저질러지는 경우가 더 많다" 는 말을 남겼다.

가족간의 애증과 갈등이 오히려 치열하다는 관찰이다. 흔히 재산상속을 노린 범죄가 그녀의 주제다.

한국 가족관계에도 경제적 이해타산의 중요성이 더해간다. 그런데도 고향찾기 행렬이 줄지 않는 것은 무슨 연고인가. 남은 토지재산 때문인가.

가족을 확대하면 민족이 된다. 유전자 검사 등 엄밀한 인종학적 검증 없이 우리는 흔히 '한 핏줄' '한겨레' 를 외친다.

동족사회라고 해서 삶이 평화롭지만은 않다. 동족간의 갈등이 오히려 치열할 수 있다는 사실은 50년 전 민족상잔의 분쟁에서 보았다. 세계적 탈이념 추세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는 낡은 이념의 노예들이 상존하고 있다.

고향은 과거 지향적이며 자칫 배타적인 개념이다. 지역연고주의.패거리 정치 등 망국적 고질병도 고향 찾기에서 비롯된다.

고향, 그것은 돌아갈 곳이 아니라 벗어날 곳이다. 고향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관념의 문제다. 지구촌화되는 세계 속 곳곳에 새로운 고향을 만들어야 발전하는 한국인이 될 수 있다.

김병주 <서강대교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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