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좀 너그럽게 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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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나는 이름이 두 개다. 호적명은 권영조(權寧詔)이고 필명이 권영빈이다.

젊은 시절 기명기사를 처음 쓰게 됐을 때 왠지 본명을 낸다는 게 쑥스럽기도 했고 '조(詔)' 를 '소' 로 불러서 놀림감이 됐던 소년기 추억이 되살아나 '권영빈' 으로 쓰기 시작한 게 40년 가깝다. 물론 호적명은 그대로다.

*** 작은 흠도 까발리는 풍토

언론인 명부에도 두 개의 이름이 각기 나오고 신문사 안에서도 월급은 '권영조' 로 받고, 기사는 '권영빈' 으로 나간다.

외국 세미나에 나갈 때도 초청은 'YOUNG BIN KWON' 으로 받고, 여권은 'YOUNG JO KWON' 으로 나간다.

북한에 드나들 때도 '권영빈' 얼굴에 '권영조' 서류로 드나들었다. 나쁘게 보자면 두 얼굴의 사나이에 속할 것이다.

5년 전 임원이 되면서 퇴직금을 받았다. 많지는 않지만 내 딴에는 소중한 돈이어서 통일지향적으로 파주 부근의 작은 땅을 샀다.

최근 경의선 연결이 가시화하면서 통일로 인근의 땅값이 들먹인다는 보도를 신문으로 보고 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이 땅값이 몇배로 뛰어 거금을 벌었다 치자. 또 여기에 만약을 거듭해 장관에 임명됐다고 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두 개의 이름을 교묘히 이용해 토지투기를 했고 수억원의 돈을 챙겼으며 위장 명의로 북한을 드나들며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인사를 장관에 임명할 수 있냐는 매도가 금방 나올 것이다.

얼토당토 않은 가정이지만, 최근 송자(宋梓)교육부장관의 해임 과정을 보면서 누구나 한번 되돌아볼 일이다.

宋장관의 죄(?)는 세 가지다. 죄명 1호가 회사 돈을 빌려 실권주를 사 16억원여를 벌었다는 것이다. 회사 돈을 빌려 산 것은 문제지만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2개의 사외이사를 겸한 것도 현행법엔 문제가 되질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결국 16억원을 번 게 탈이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 당시 그 회사는 실권주를 임원들에게 강요하다시피 맡겨 임원들 모두 내심 불만이었다고 한다.

이런 불만주를 사들인 게 그의 혜안이라면 혜안이었지 탓할 바는 못된다. 그후 주식값이 올라 다행이지 거꾸로 투자한 돈을 몽땅 날려버렸을 경우에도 장관직 수행에 그의 도덕성 문제가 이처럼 시끄럽게 제기됐을까.

죄명 2호는 그의 국적 시비다. 그의 국적문제는 이미 그가 연세대 총장 시절 따질 만큼 따졌고 그 과정에서 진술이 엇갈린 부분도 있어 수모를 받을 만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오히려 세계화시대에서 이중국적을 문제삼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 본다. 지나치게 순혈주의를 강조하고 이중국적이면 무조건 비애국자로 모는 우리의 잠재된 의식에 문제가 있다.

이미 심판까지 내린 사안을 다시 들춰내 장관직에서 끌어내려야만 했을까. 여론재판엔 일사부재리 원칙도 없나. 그게 그처럼 중죄에 속했다면 어째서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고 대학을 운영하는 총장은 두번씩이나 가능했고 장관직엔 끝까지 불가한가.

죄명 3호는 남의 책을 베꼈다는 부분이다. 문제의 교재엔 저자명을 달긴 했지만 누구누구 책을 텍스트로 해서 쓴 사유를 적고 있다.

물론 이럴 때는 편저로 하든지, 역자로 붙였어야 마땅했다. 학자로서 자기관리에 철저하지 못한 데는 분명 하자가 있다. 그러나 그 교재는 이미 20여년 전에 발간된 것이다.

20년 전의 작은 과오를 문제삼아 우리 사회의 지도적 인물로 살아온 사람을 하루아침에 파렴치범으로 몰아 장관직에서 쫓아낸 다음 '어이 시원하다!' 고 손을 털며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도덕적인가. 나의 사랑은 로맨스고 남의 사랑은 스캔들인가.

*** 포용력 있는 사회가 발전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이 합리적이질 않고 우리 모두가 바람과 감정의 포로가 돼 인민재판식으로 몰아가는 비이성적 풍토에 살고 있지 않는가.

장관이라는 고위직엘 오르려면 전력(前歷) 점검을 거쳐야 하고 공인으로서의 능력과 도덕성을 따지는 절차는 분명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따질 것은 따지고 봐줄 것은 봐줘야 하는 준칙이 있어야 한다. 대학을 기업정신으로 살리고 대학 경쟁력을 교수의 연구능력에 두고 채찍질한 총장이라면 교육행정의 책임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다.

하나라도 똑 부러지게 배워야 한다는 그의 교육방향도 이 시대에 맞는 교육철학이다. 좋은 자질을 갖춘 장관이면 작은 흠은 덮어줄 줄 아는 포용력 있는 사회라야 이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

남이 돈번 것을 못참고 남이 잘되는 것을 못보는 항아리 속의 참게 같은, 남 끌어내리기 풍조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좀 너그럽게 살자.

권영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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