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명태' 작곡가 변훈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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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밤 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짝짝 찢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내 이름은 남아있으리라. 명~태라고..."

지난달 29일 74세로 별세한 작곡가 변훈(邊焄)씨에게 '명태' 는 한국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대표작인 동시에 '쓰라린 추억' 이 담긴 가곡이다. 또 그가 음악을 포기하고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한 것도 이 노래 때문이다.

연희전문학교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휘자 정종길씨에게 작곡을, 바리톤 최봉진에게 성악을 배운 그는 1952년 부산극장에서 이 곡을 발표했다.

하지만 베이스 오현명(吳鉉明)의 노래가 끝난 뒤 음악평론가 이성삼(李成三)씨가 연합신문에 쓴 '이것도 노래라고 발표하나' 라는 평론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홍난파류 가곡에 익숙해 있던 음악계의 몰이해와 냉대 때문이었지만 작곡자가 음악학교 출신이 아니라는 편견도 작용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어쨌든 그는 이후 음악을 접고 외무부에 특채돼 직업외교관의 길을 걷게 됐다.

고인의 빈소를 찾은 吳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부산 해군정훈악대에 복무 중이던 어느날 邊씨가 악보 뭉치를 들고 찾아왔어요. '귀향의 날' '낙동강' 등 6곡의 가곡이 들어 있었죠. 노래를 부르던 친구가 작곡도 하나 싶어 깜짝 놀랐습니다.

그 중 유난히 눈길이 간 노래가 '명태' 였어요. 하지만 공연 때 객석 여기저기서 터지는 웃음 소리를 듣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죠. "

그는 "고인은 대범하고 선이 굵은 성격의 소유자" 라며 "음악계의 아웃사이더로 평생 나그네처럼 살았지만 불의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고 회고했다.

'명태' 의 탄생지는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던 50년 9월 안동. 종군기자 양명문 시인이 여관방을 함께 쓰던 고인과 김동진(金東振)씨에게 '낙동강' '명태' 등 2편의 시를 동시에 주며 작곡을 권유한 데서 비롯됐다.

초연이 실패로 돌아간 '명태' 가 한국 가곡사의 획을 긋는 수작으로 재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70년대말. 음악평론가 서우석(徐友錫)씨는 '문예중앙' 80년 겨울호에 쓴 '음악과 사실성' 이라는 글에서 "언어의 억양과 사실성에 충실한 노래" 라고 극찬했다.

이어 음악평론가 박용구(朴容九)씨도 "홍난파.현제명류의 여성적.애상적 가곡에서 탈피한 '명태' '쥐' 등은 40년대 이 땅에 리얼리즘 가곡의 씨앗을 뿌린 김순남.이건우의 맥을 잇는 듬직한 산봉우리" 라고 평가했다.

이에 고무된 고인은 81년 28년간의 직업외교관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 여의도에 '오페라하우스' 라는 레스토랑을 연 뒤 '시와 노래와 그림과' 라는 모임을 만들어 매달 한차례씩 서로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내로라 하는 성악가.시인.화가들이 이곳을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또 시인 정공채(鄭孔采)씨와 콤비를 이뤄 전국을 누비면서 조국 산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임진강' '한강' '설악산아' '한려수도' '한라산' 등의 노래에 담아냈다.

김소월의 '초혼' ,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명시(名詩)의 가곡화 작업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난달 31일 발인예배에서는 테너 임정근씨가 고인이 병상에서 완성한 유작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를 초연해 주위를 숙연하게 했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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