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슈바이처' 자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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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빈민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아르헨티나의 한 노의사가 돈이 지배하는 의료계의 현실에 대한 거듭된 좌절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충격을 주고 있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1967년 세계 최초로 심장 혈관이식 수술에 성공했던 아르헨티나 명의 레네 파발로로(77)는 지난달 29일 자신의 집에서 권총으로 가슴을 쏴 자살했다.

그는 자살 전날 자신이 일하던 병원에다 "나는 모든 환자가 동등하다는 믿음으로 일해왔다" 는 내용의 메모를 유서로 남겼다.

아르헨티나 빈민가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파발로로는 50년대부터 가난한 이웃들에게 무료시술을 해왔다.

그러다 67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클리닉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 다리 혈관으로 막힌 심장 혈관을 대체하는 획기적인 수술에 성공했다.

병원측은 그에게 "영주권을 얻도록 해줄테니 아예 이민 오라" 고 설득했다. 하지만 파발로로는 이를 거절한 채 귀국, 다시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92년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자선 의료사업에 뛰어들었다.

정부보조금과 사회단체의 지원을 받는 의료기금을 설립해 2백60개 병상과 최신 치료기구를 갖춘 병원을 연 것이다. 환자의 20%는 언제나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빈민들이었다.

파발로로는 90년대 들어 아르헨티나 정부가 의료지원 예산을 줄이고 의료보험 정책을 개인보험 위주로 전환하자 이에 저항했다.

결국 파발로로의 병원은 무료 또는 외상진료로 인해 7천만달러(약 7백70억원)나 되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그의 자살은 결국 갚을 길 없는 빚에 대한 부담감과 아르헨티나의 의료현실에 대한 좌절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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