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정치]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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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Last Exit to Brooklyn)' 는 1964년 책으로 출간될 때부터 외설 시비에 휘말려 논란이 많았다.

결국 버트런드 러셀과 사뮈엘 베케트 등이 '근래에 쓰여진 가장 중요한 책' 이라고 손을 들어줌으로써 명예회복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을 원작으로 해 울리 에델 감독이 만든 영화(89년 제작)는 그 시비를 염두에 두어선지 그다지 외설스럽지 않다.

52년 뉴욕 브루클린 뒷골목 85번가 사람들의 이야기다. 창녀 트랄라(제니퍼 제이슨 리)와 창녀를 등쳐먹는 깡패들이 나오고, 노조 파업 주동자 해리(스테판 랭)와 노조원들, 6.25 파병을 기다리고 있는 군인들이 나온다.

거리 중심에는 공장이 있고 그 공장은 파업으로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공장을 어떻게 해서라도 가동하려는 회사측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노조원들이 대치하고 있다.

이러한 공장 파업이 거리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하고 있는 듯 보인다. 거리는 황량하게 비어 있고 활기를 잃었다.

그 사회에서 중요한 이해 당사자들이 타협을 통해 화해하고 협력하지 못할 때 그 사회 전체는 브루클린의 뒷골목처럼 황량해지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의약분업 분쟁으로 인한 대치 상태가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지 않은 채 계속되고 있다.

브루클린에서 공장 파업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사회도 의약분업 분쟁이 해결되지 않는 한 다른 것이 아무리 잘 돼도 신이 날 수 없다.

남북한 관계가 개선되고, 이산가족들이 만나고, 개성으로 가는 길이 열리고, 경의선이 연결되고 하여도 의약분업 분쟁 때문에 영 마음이 개운하지가 않다.

브루클린에 활기가 되살아나려면 회사측과 타협이 이뤄져 파업이 끝나고 노동자들은 공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 사회에 활기가 되살아나려면 의사들과 정부간에 타협이 이뤄져 의사들이 직장인 병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의료계 폐업이 노조 파업과는 차원을 달리하곤 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둘 사이의 구분은 모호해진다.

의사들의 폐업이 자기들도 하나의 노동자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점도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할 것이다.

말하자면 노조 집단이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인데 이 점은 정부가 충분하고 세심하게 배려해줘야 한다.

정부가 의사들을 향해, 너희들은 뭐 특권집단이냐 하는 식으로 나오면 타협은 더 어려워진다. 브루클린에 파업이 오래 지속되자 파업 주동자들이 처음에 가졌던 목표를 상실하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퇴폐적인 일탈(逸脫)로 빠져든다.

파업 주동자 해리는 아내와 딸을 가진 버젓한 가장임에도 불구하고 동성연애에 탐닉해 노조 돈까지 함부로 쓰게 된다.

파업에 따르는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해선 종교적 차원과 맞먹는 고도의 정신 수양이 필요한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정부는 의사들이 오랜 폐업으로 정신적으로 황폐해지는 사태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속히 처방전을 내놓아야 한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웬만한 의사들은 미국 의사 자격증 시험 준비를 하며 이민갈 생각들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징후들은 의사들의 정신적인 황폐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들이다. 이런 사태가 지속되다 보면 정부도 어느새 황폐해져 이전의 독재적인 처방을 내릴지도 모른다.

양쪽 다 합리적인 분별력을 잃고 황폐해진다면 우리 국민은 그야말로 마지막 비상구마저 열리지 않는 가운데 영화의 해리와 트랄라처럼 피투성이가 돼 쓰러지고 말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 비상구로 '국경없는 의사회' 회원들이 대거 한국으로 날아올지도 모른다.

영화의 대단원은 타협이 이뤄져 파업이 끝나고 노동자들이 공장으로 돌아옴으로써 거리 전체에 활기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우리도 속히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조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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