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의약분업 해보니 환자 급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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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의사협회의 재폐업 결정은 복합적인 상황판단에 따른 전략적인 것이다. 갑작스레 기존의 재폐업 유보방침을 번복한 것이 아니다. 대내외 상황을 종합해 시기가 성숙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의협의 주장은 이렇다. "의약분업을 열흘 정도 해보니 당초의 예측대로 많은 문제가 드러났다.

결국 우리가 배를 곯게 됐다. 그래서 문을 닫겠다. 의보 수가(酬價)인상 등 요구를 수용해 달라" 는 것이다.

의협은 주변 여건이 갖춰졌기 때문에 국지적.산발적 폐업과는 다른 전면적인 폐업이 진행될 것이라고 예고한다. 지난 6월 폐업 때의 악몽이 재현될 우려가 크다.

◇재폐업 결정 배경〓첫째, 짧게나마 의약분업을 해보니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다고 한다.

당초 보건복지부는 약국만 이용하던 환자 중 연간 2천3백53만여명이 동네의원을 이용할 것으로 전망했다.

연간 2천4백여억원의 수입이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의협은 1~8일 일부만 휴업했고 대부분 동네의원들이 문을 열었으며 이들을 무작위로 뽑아 환자 증감현황을 조사했다.

이 결과 30% 이상 환자가 줄었다는 것이다.

둘째, 내부적으로 투쟁역량이 극대화했다고 판단했다.

의협 관계자는 "환자가 주는 데다 약사들의 임의조제와 변경조제가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면서 "진료권을 침해할 뿐아니라 환자를 뺏기기 때문에 폐업을 반대했던 의사들마저 등을 돌리고 있다" 고 전했다.

또 가톨릭대 의대와 연세대 의대 교수들이 외래진료 철수를 결의해 폐업에 부정적이던 의대 교수들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고 봤다.

전공의와 전임의들이 계속 파업을 벌이고 있어 내부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는 점, 복지부장관이 교체되고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해결에 전력하라고 지시한 점 등 대내외적인 여건이 강하게 밀고 나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전망〓의료계는 ▶대체조제 전면 금지 등을 명시하기 위한 약사법 전면 재개정▶지역의료보험 재정 50% 국고지원 등 기존의 요구사항을 다시 꺼내 들었다.

시계추를 6월 20일 폐업에 들어가기 전의 상황으로 되돌려 놓았다.

단지 김재정 의협회장 등 구속자 석방과 수배자 해제라는 대화의 전제조건이 붙은 게 차이점이다.

기존의 요구사항을 되풀이하는 이유는 요구대로 관철되지 않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9일 이한동(李漢東)총리 주재의 관계장관 대책회의에서 의보수가 단계적 인상방안 등 세가지 당근을 내놨지만 의료계의 재폐업을 중단시키는 데는 효험이 별로 없을 것 같다.

박훈민 전공의 비상대책위 대변인은 "이전과 달라진 게 별로 없으며 대부분의 전공의들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고 판단할 것" 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따라서 정부가 10일 하루 동안 의료계를 설득하지 못할 경우 동네의원.의대교수.전공의.전임의.의대생 등 범의료계가 지난 6월처럼 일사불란하게 의료대란을 일으키는 쪽으로 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접점은 있다. 의협의 또 다른 관계자는 "정부가 수가 인상에 대한 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요구조건을 다룰 보건의료발전특위 위원이나 운영을 의료계가 주도할 수 있도록 하면 상황은 반전될 수도 있다" 고 했다.

변수도 있다. 의료계의 의사결정 구조다. 의협 상임이사들과 의권쟁취투쟁위가 여전히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의협 수뇌부가 중심이 돼 정부와 견해 차를 좁히더라도 의쟁투와 의견 일치를 보지 않아 폐업과 유보를 반복하는 상황이 오면 여전히 미로를 헤맬 수밖에 없다.

신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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