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의 세상바꿔보기] 빌헬름 텔의 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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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빌헬름 텔의 무용담은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여서 새삼스레 언급한다는 게 쑥스럽다. 그러나 지난번 학회 때 현지에서 듣고 본 줄거리엔 폭정에 항거하는 민중의 용감성 만큼이나 '부자(父子)의 믿음' 도 강조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만약 아버지 만큼이나 용감한 아들이 없었던들 그리고 죽음도 두렵지 않은 부자간의 믿음이 없었던들 빌헬름 텔의 이야기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줄거리는 알려진대로 간단하다.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파견된 게슬러 제독의 학정은 날로 심해지고 있었다. 용감한 젊은이들이 항거하기 시작했고 텔은 특히 민중의 영웅이었다.

어느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 텔에게 역적모의한 자를 구해줬다는 죄명을 씌워 재판에 회부한다. 처형선고와 함께 둘러싼 군중의 실망.분노.신음소리가 하늘을 울린다.

군중 속엔 아홉살 난 그의 아들도 초조와 두려움 속에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무력한 민중은 속수무책이었다.

제독은 그래도 성이 안찼던가.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얹고 활을 쏴 맞히면 석방하겠다는 것이다. 제법 관용이나 베풀 듯.

한참을 생각하던 텔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순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처형을 받겠다는 뜻이다. 군중은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였다.

겁먹은 얼굴로 지켜보던 아들이 뛰쳐나온다. '아버지, 난 무섭지 않아요. 아버지는 할 수 있어요. 난 아버지를 믿어요. '

소년은 사과를 받아들고 보리수나무 아래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리곤 아버지를 향해 돌아선 아들이 자신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사과를 머리 위에 놓는다.

망연자실. 아버지는 차마 바로 볼 수도 없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가고 군중은 숨을 죽이고 있다. 텔은 사방 하늘을 둘러본다. 그날 따라 바람이 세다. 거세게 깃발이 나부낀다.

빨리 선택하라는 제독의 지시가 떨어진다. 아들을 본다. 눈하나 깜짝이지 않고 흔들림이 없다. 자신있는 표정이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천천히 화살을 뽑는다.

'그래, 넌 흔들리지 않을거야. 난 너를 믿는다.' 아버지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을 것이다.

드디어 장전. 활을 드는 순간 거세게 불던 바람도 멎고 죽음에 휩싸인 듯 온 천지는 무거운 긴장 속에 잠긴다. 이윽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 화살은 정확히 사과를 꿰뚫는다.

그 뒷이야기는 우리가 아는대로다. 사과를 꿰찬 그 화살로 끝내 제독의 심장을 쏴 쓰러뜨리면서 민중항쟁에 불을 붙인다. 그리곤 스위스 산골에 처음으로 민중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민주주의의 토대가 마련된다. 13세기께 이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도 촉발하는 등 민주주의의 기수로 높이 칭송받게 된다.

그러나 최근 스위스에는 정치적 의미보다 아들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 특히 믿음으로 얽힌 부자의 끈끈한 유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도 최근의 가정붕괴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요즈음 스위스는 조상 대대로 이어온 목축업 계승에 젊은이들이 몰리고 있다. 땅으로, 산으로 돌아가자는 젊은 운동이다. 거기에 스위스의 전통이 있고 자부와 긍지, 그리고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조상의 얼을 새기자는 운동이다.

잘 알려진 싱거운 이야기를 길게 쓰는 까닭을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알리라. 한국의 부자, 한국의 조상은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까. 이 생각만 하면 왜 그 끔찍한 살부사건들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다.

돈 잘쓰는 아들을 둔 아버지라면 잘 때 방문단속을 잘해야 한다는 이 웃지 못할 소리가 언제부터인가 시중에 나돌고 있다.

아버지에게 거짓말하는 것쯤은 약과다. 무시하고 빈정거리고, 어디 반항만인가. 사기.횡령.폭력까지 부자관계는 상처투성이다. 어쩌다 우리 아이들이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누가 이렇게 키웠는지, 하늘이 부끄럽다.

아이는, 특히 아들은 아버지 등 뒤를 보고 배운다. 이래라 저래라 말로 키우는 게 아니다. 아버지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

정직하고 믿을 수 있는 아버지, 존경과 애정으로 아이들이 아버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과연 그런 아버지로 비춰질 만큼 언동을 바로 하고 있을까. 자신있게 대답 할 수 있는 아버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현대화라는 미명 아래 전통도 가풍도 규범도 없는, 어정쩡한 가정으로 만들어 놓은 건 아닌지, 텔의 아들을 지켜보면서 다시 한번 점검해봐야 한다.

이시형 <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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