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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의 죄, 은행의 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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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금호의 죄는 익히 알려졌다. 가장 큰 항목이 과욕이다. 빚을 내 무리하게 대우건설을 삼켰다. 그랬다가 탈이 났다. 목에 걸려 토했다. 이른바 ‘승자의 저주’다. 죗값도 혹독히 치르고 있다. 지난해 연말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이제부턴 은행의 간섭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총수의 사재(私財) 출연도 피하기 어렵다. 당장 이틀 전 새해 시무식 풍경도 달라졌다. 금호의 전 임원이 사표를 냈다. 처분만 바라는 신세가 됐다.

은행의 죄도 과욕이다. 어찌 보면 금호보다 더했다. 2006년 상황을 복기해보자. 그해 11월 금호는 대우건설을 6조4000억원에 샀다. 그중 2조9000억원만 금호가 넣었다. 반도 안 된다. 나머지 3조5000억원은 이른바 ‘재무적 투자자(Financial Investor)’가 댔다. 신한·기업은행은 물론 산업은행 자회사인 대우증권도 있었다. 시장에선 4조원 안팎이면 적절하다는 분석이 많았다. 그런데도 값이 크게 뛴 건 두 가지 이유다. 첫째는 경쟁이다. 여섯 회사나 입찰에 참여했다. 둘째는 전주(錢主)다. 재무적 투자자들이 뒷돈을 두둑이 댔다. 뒤가 든든하면 도박판에서도 베팅이 커지는 법이다.

판이 커지자 전주들도 겁이 났다. 안전장치라며 가혹한 상환 조건을 붙였다. 3년간 연 9%의 복리 이자를 보장하도록 했다. 잘못되면 금호가 대신 물어내도록 했다. 이른바 풋백옵션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리(高利)로 빌려준 뒤, 못 갚으면 가족·친구에까지 빚 독촉 하는 무면허 사채업자와 다를 바 없다.

경제에 가정은 없다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자. 3년 전 은행이 뒷돈을 안 댔다면 어땠을까. 금호는 대우건설을 사지 못했을 것이다. 샀더라도 이만큼 비싸게는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다른 투자자를 구했을 것이란 반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은행이 빠지면 전주를 모으기 힘들다. 한 재무적 투자자는 “은행이 뛰어드니 따라갔다”고 말했다. “혹여 잘못돼도 은행이 앞장서서 해결해 줄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위험이 크면 투자를 접는 게 상식이다. 은행은 더 그래야 한다. 잘못되면 공적자금이 들어간다. 외환위기 때 큰 대가를 치르고 배운 교훈이다. 그래서 개인 고객에게 깐깐해도, 중소기업에 까칠해도 봐주는 것이다. 예컨대 주택담보대출만 봐도 그렇다. 가장 떼일 염려가 없는데도 은행은 집값의 60%만 빌려준다. 투기를 우려해서다. 그러고도 부족해 빚 갚을 능력까지 따진다. 그런 깐깐함이 3년 전 금호에 빌려줄 때는 사라졌다. 욕심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다.

금호와 은행이 욕심을 부린 데는 배경이 있다. 당시는 은행이든 기업이든 돈이 넘쳤다. 큰 은행은 한 해 1조원씩 순이익을 냈다. 기업은 수백조원의 돈을 쌓아놓고 있었다. 기업이 돈을 안 쓰니 은행은 돈 굴릴 곳이 없었다. 유일하게 돈이 되는 곳이 인수·합병(M&A) 시장이었다. 덩치를 키우고 싶은 기업과 돈 굴릴 곳을 찾는 은행 간 궁합이 딱 맞았다. 금호가 인수한 대우건설·대한통운은 물론 한화가 인수하려 한 대우조선해양까지 M&A 매물의 몸값 급등 릴레이가 이어졌다. 마침 미국발 금융위기가 브레이크를 걸어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화는 핑계 김에 인수를 포기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한화도 금호 꼴이 났을지 모른다.

올해는 미뤘던 대형 M&A 매물이 쏟아진다. 대우조선해양·하이닉스·우리금융지주, 거기에 외환은행까지. 기업은 여전히 현찰을 쌓아놓고 있다. 은행 역시 여전히 돈 굴릴 곳이 없다. 물론 금호 꼴을 봤으니 은행이든 기업이든 도박판식 베팅은 안 하리라 믿는다. 혹여 또 같은 일이 반복되면? 그땐 국민이 던지는 돌이 은행부터 향할지 모른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