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방송프로 정화에 장관직 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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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박지원(朴智元)문화관광부장관이 방송에서 선정성과 폭력성을 몰아내는 데 장관직을 걸겠다고 말했다.

朴장관은 어제 언론사 문화부장들과 만나 "방송 프로그램의 선정성과 폭력성이 사회적으로 인내할 수 있는 수위를 넘어섰다" 면서 "장관직을 걸고 이를 추방하겠다" 는 결의를 보였다.

방송 프로그램의 선정성과 폭력성이 위험수위를 넘어섰다는 朴장관의 지적에 우리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방송사간 시청률 경쟁이 갈수록 도를 더하면서 심지어 청소년용 프로그램에서조차 섹스와 폭력이 빠지면 '장사' 가 안되는 한심한 지경이 됐다. 방송의 건전성 확보를 위해 선정성.폭력성은 주저없이 척결해야 할 당면과제다.

그러나 접근방식이 잘못됐다. 관련부서 장관이 '자리' 까지 걸어가며 이를 바로잡겠다는 의지 표명은 제도와 절차를 무시하고 너무 앞서간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통합방송법에 따라 독립적인 방송총괄기구로 출범한 방송위원회가 버젓이 있는데 문광부장관이 직접 나서 방송 프로그램을 바로잡겠다는 것은 방송위원회의 독립성을 침해할 위험이 있다. 명분을 앞세워 정부가 방송을 쥐고 흔들겠다는 저의로 의심받을 수 있다. 방송 프로그램 심의권은 정책사항이 아닌 방송위의 고유권한이다. 이를 정책권 운운하며 개입한다면 방송위의 독립성 저해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된다.

공교롭게도 朴장관의 강력한 경고 메시지가 나온 지 불과 몇시간 만에 방송위는 공중파 방송 3사 사장들을 불러모아 방송 프로그램의 선정성.폭력성 지양을 위한 '자정 결의' 를 했다.

그동안 방송위는 뭘 하다가 장관의 한마디에 화들짝 놀라 자정 결의까지 하는지 한심한 생각도 든다.

방송위가 정부의 개입을 차단하고 독자성을 유지하려면 스스로 먼저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방송 프로그램 문제에 대해 효과적이고 강력한 대책을 마련했어야 옳다. 장관이 떠들고 이에 맞춰 방송위가 따라 움직이는 모양새는 방송의 독립성을 스스로 허무는 자해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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