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우리 돈의 자존심 회복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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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본은 2000년을 기념해 최근 2천엔짜리 새 돈을 발행했다. 새 돈은 얼굴을 내밀자마자 인기폭발이다.

은행마다 모자란다고 야단들이어서 중앙은행은 예정했던 발행규모를 더 늘리기로 했다. 이런 추세라면 기존의 5천엔권보다 더많이 발행될 전망이다.

*** 수표 유통비 지폐의 4배

2천엔권은 한국돈으로 따지면 최고액권인 1만원짜리의 2배쯤에 해당한다. 그 위에 5천엔권과 1만엔권이 있다. 따라서 2천엔짜리 발행을 놓고 애당초 고액권 시비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필요성을 느끼던 차에 2000년을 계기로 발행했을 뿐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고액권 1만원짜리는 환율을 감안할 때 일본의 1천엔, 미국의 10달러짜리다. 이들 나라로 치면 고액권은커녕 소액권이다. 한국 고액권의 구매력은 이들에 비해 10분1에 불과한 셈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우리도 그동안 10만원권 발행을 여러차례 검토해 왔으나 번번이 유야무야 됐었다. 필요한 것이로되 그럴 형편이 못된다는 이유로 여태 미뤄왔던 사항이다.

이유는 크게 두가지. 10만원짜리 돈이 새로 나오면 첫째, 인플레를 조장하고 소비심리를 부추길 우려가 있으며 둘째, 검은돈의 추적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고액권 발행을 미룬 채 10만원짜리 은행 자기앞수표로 그 역할을 대신해왔던 것이다.

언제까지 구더기 무섭다고 장을 안 담글 것인가. 세상에, 수표가 고액권 역할을 하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어디 있을까. 수표는 수표고 돈은 돈인데, 언제까지 돈 역할을 수표로 대신할 것인가.

수없이 논의됐지만 그 부작용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은행 일손을 바쁘게 할 뿐 아니라 돈보다 위조가 쉽고 낭비 또한 엄청나다. 당국의 계산으로도 10만원짜리의 연간 유통비용이 수표가 돈보다 4배 이상 비싸다.

약 7천억원이 더 든다고 한다. 평균수명을 따져봐도 수표는 한번 태어나서 12일밖에 못살고 곧바로 죽어야 한다. 돈과는 비교도 안된다.

수십년간 경제규모나 물가수준이 엄청나게 달라졌는데, 굳이 돈만은 줄기차게 10달러짜리 이상은 안된다고 고집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물가상승이나 부정부패 조장 등의 핑계는 더이상 설득력이 없다.

10만원짜리가 없었는데도 그동안 빚어졌던 물가상승과 부정부패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경제위기 탓으로 엄두를 못냈다면 한숨 돌린 이제라도 서둘러 10만원짜리를 발행해야 한다. 불편한 것도 불편한 것이지만 국제적으로도 문제다.

국제화라는 게 수입개방 따위만 뜻하는 게 아니다. 돈도 국제규격에 맞아야 한다. 언젠가는 한국 돈도 해외에서 자유롭게 통용될 텐데 어쩔 것인가.

1만원권 다발을 뭉치 뭉치로 들고 다닐 것인가, 아니면 국내에서처럼 자기앞수표를 내놓고 일일이 주민등록번호와 전화번호를 뒷면에 써가면서 받아달라고 떼를 쓸 것인가.

고액권을 발행하지 않는 한 해외 여행객들은 지금처럼 여전히 환전료를 물어가며 달러 바꾸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형편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고액권 발행을 미루고 있는 것은 오로지 정부당국이나 중앙은행이 전적으로 책임질 일이다.

고액권 발행에 따른 부작용을 자기들이 지나치게 강조해온 나머지, 시대와 상황의 급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족쇄에 꼼짝 못하고 있는 꼴이다.

*** 10만원권 발행 서둘러야

유사한 일이 과거에도 있었다. 전두환(全斗煥)정권 시절, '통화증발=물가상승' 이라는 공식을 전국민적으로 주입시킨 나머지 통화정책의 경직성을 자초했던 경우도 그런 예다.

1만원짜리 한장으로 일본에 오면 2백엔짜리 시내버스 다섯번 타면 끝이다. 돈에도 자존심이 있다면 분명 한국돈의 망신이다.

고액권을 금기시하는 것은 마치 부질없이 부자를 미워하는 것과 비슷한 정서일 게다. 기실 부자는 모두가 되고싶어 하고 고액권은 편리하고 꼭 필요한 것이다. 돈의 국제화 또한 시급한 과제다. 물가상승이나 부패추적은 그것들대로 적절한 대책을 세워 해결할 과제다.

이장규 <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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