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 G8 수뇌들의 광상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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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공허한 말잔치에 그쳤다는 혹평속에 막을 내린 오키나와(沖繩) 주요8개국 (G8)정상회의는 그 구성부터가 세계문제를 진지하게 다룰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8개국 중 4개국이 유럽연합(EU)회원국으로 그 수뇌들은 한결같이 대서양주의자들(Atlanticist)이어서 북미와 유럽문제에만 구체적인 관심을 가질 뿐 아시아는 경제적으로 그들의 상품을 위한 방대한 시장이라는 인식뿐이다.

이번 회의의 가장 웃기는 장면은 국내총생산 6천억달러의 러시아가 객원으로 초청되고 9천억달러가 넘는 중국이 제외된 것이다.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가입을 앞두고 있는 세계 아홉번째의 무역국가다. 거기에다 오키나와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심장부다.

총인구 8억5천만명의 유럽을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네나라가 대표한 반면 36억명의 아시아는 일본 혼자 대표한 것도 문제다.

일본은 중국 초청을 거론했지만 대서양주의자들이 호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선진국 정상회의는 백인 부자나라들의 사교모임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아시아국가로는 일본이 들러리를 서서 구색을 갖춰준 셈이다. 그래도 그건 서양사람들의 잔치였다.

역사상 어느 시대든지 그 시대 나름대로 세계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이 있게 마련이다.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두개의 세력권으로 양분해 대립하던 냉전시대에는 핵전쟁의 공포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한국.중동의 지역분쟁과 지구의 북반부와 남반부의 빈부격차(남북문제)가 주요 현안들이었다.

냉전이 끝나고 10년이 지난 지금 세계의 주요문제는 한반도와 중동의 평화, 미국이 추진하는 국가미사일방위(NMD)와 전역미사일방위(TMD)체제, 핵확산방지, 에이즈, 선진국과 후진국간의 심각한 정보통신기술의 격차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오키나와에 모인 선진국 수뇌들은 이런 문제의 어느 하나에 관해서도 합의는 고사하고 진지한 논의를 하지 않았다.

한가지 예외가 있었다면 한반도에 관한 특별성명을 낸 것이다. 선진국 수뇌들은 남북 정상회담에 지지를 표명하고, 특히 북한에 대해 미사일 발사의 동결과 관련된 노력을 계속할 것과 인권에 관한 국제적인 우려에 건설적으로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

이것은 김정일(金正日)의 평화노력을 '국제화' 해 북한판 햇볕정책의 후퇴를 어렵게 만든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것 뿐이다. 다른 문제에서는 아무런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 특히 세계여론을 실망시킨 것은 세계 전체의 부(富)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부자나라의 대표들이 모여 초호화판 회의를 하면서 가난한 나라들의 빈곤문제 해결엔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사회문제에 민감한 영국신문들의 질책이 신랄하다. 타임스는 선진국 수뇌들이 캐비어를 먹으면서 빈곤국가들의 채무문제를 논의했다고 비꼬았다.

캐비어는 값비싼 요리의 상징이다. 어느 비정부기구(NGO)의 대표는 이번 회의에 든 비용이면 빈곤국가 어린이 1천2백만명을 학교에 보낼 수 있다고 말했고(일본경제신문 보도), 파이낸셜 타임스는 오키나와 회의 경비는 감비아라는 아프리카 나라의 채무를 상환할 수 있는 액수라고 계산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선진국 정상회의가 미군기지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런 기대도 허망하게 무너졌다.

클린턴은 오키나와가 미.일동맹에 "사활이 걸린 중요한 역할" 을 한다고 강조해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변화가 없을 것임을 확실히 했다. '수뇌들의 광상곡' 이라는 아사히 신문의 표현은 구심점 없는 회의 성격을 잘 드러냈다.

국내정치를 의식한 클린턴과 푸틴이 개인플레이에 열중한 오키나와 G8 정상회의는 그 초호화판으로 후진국에 좌절감만 안겼다.

중국.호주.브라질 같은 나라를 참가시켜 부자들의 사교클럽 같은 체질에 물타기를 하지 않는한 선진국 정상회의는 8대재벌 총수들의 골프모임 정도로 성격이 바뀔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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