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민주당의 '날치기' 정치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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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6대 국회에 걸었던 기대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다. 여야가 그동안 새로운 국회상에 대한 국민적 염원은 아랑곳없이 사사건건 정쟁만을 일삼더니 급기야 몸싸움에 날치기까지 해치웠으니 실망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다.

이만섭(李萬燮)국회의장이 "국회에서 날치기라는 말을 영원히 사라지도록 하겠다" 고 천명한 게 얼마전이다.

어제 국회 운영위에서 민주당과 자민련에 의해 날치기 처리된 원내 교섭단체 구성요건 완화를 골자로 한 국회법 개정안이 그렇게 서둘러 강행 처리해야 할 만큼 화급하고 중요한 사안이었던가.

이 안건이 처음 제의될 때부터 그동안의 논란과정, 그리고 운영위 날치기 처리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은 한마디로 정략적 정치게임의 극치라고 평할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원내 교섭단체 구성요건의 조정 필요성에는 공감해 왔다. 국회의원 전체 숫자가 15대 2백99명에서 2백73명으로 줄어든 만큼 그에 따른 인원조정 주장은 현실적으로 타당성이 있다.

문제는 여야 각당이 이 사안을 놓?자신들의 정파적 이해득실 차원으로만 접근해 왔다는 데 있다. 효율적인 원내 운영을 위한 교섭단체 수를 따져본다든지, 의원 숫자가 줄어든 데 따른 비율을 계산한다든지 하는 생산적 토론 모습은 한번도 보이지 못했다.

현재 20석을 왜 10석으로 줄여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했다. 오직 '자민련 내편 만들기' 의 정략과 힘의 논리뿐이었다.

이번 개정안의 실질적 수혜자라 할 수 있는 자민련은 개원 이후 총선 패배에 따른 자기반성은커녕 여당을 협박하고 떼쓰기로 일관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자민련이 총리.국회부의장을 차지한 데 이어 교섭단체의 뜻까지 거뜬히 관철하는 걸 지켜보는 국민의 심정은 어떨까. 이것이 과연 자민련 17석의 총선 민의에 부응하는 것인가.

민주당이 서둘러 처리한 배경 중엔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와 자민련 김종필(金鍾泌)명예총재의 회동에 자극받은 측면이 많은 것으로 읽혀진다.

자민련이 한나라당쪽과 가까워진다면 정국 운영이 어려울 것이란 초조감이 무리수를 두게 된 것 같다. 자민련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던 한나라당 입장이 누그러진 점을 감안한다면 교섭단체 조정 문제는 충분히 협의 처리될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런데도 민주당이 16대 국회 첫 날치기라는 험상궂은 모양새를 마다않고 서둘러 처리한 것은, 자민련에 성의를 보여 연대를 강화하겠다는 속이 들여다보이는 얄팍한 정치게임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의 반발로 모처럼 속개된 국회가 또다시 마비.파행을 겪고 있다.

그 해결책은 민주당에서 제시해야 한다고 본다. 날치기 처리에 대한 사과부터 하고, 교섭단체 숫자 조정을 합의 처리토록 하는 게 제대로 된 모양새라고 생각한다. 집권당으로서의 여유를 보여야 할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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