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내 인생 소리에 묻고 (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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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16. 판소리 복원 작업

'춘향가' 는 사설 그대로 하면 무려 10시간이나 걸리는 작품이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다듬어 8시간 20분 분량으로 만들었다. '흥보가' 를 공연한 이듬해인 1969년 5월 20일 국립극장에서 제2회 완창 판소리 '춘향가' 공연을 가졌다.

장장 8시간 동안 소리를 하는데 나도 몰래 대본에도 없는 말이 막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객석에서는 오히려 좋아라 했다.

그때부터 나는 관객에 맞게 내 나름대로의 사설을 많이 늘어놓게 되었고, 창작 판소리와 판소리 열두 마당 복원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는 판소리란 즉흥성이 가미된 예술이다. 그때 그때의 공연자의 심정이라든지 정치.경제 등이 돌아가는 상황을 문제 삼아서 사설을 붙이는 풍자와 해학이 판소리의 생명인 것이다. 또 그래야지만 관객들도 공감을 하고 감명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은 예전만큼 소리 공연이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 소리가 퇴보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소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녹음기로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연장에 와서 들으며 함께 울고 웃고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또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남자 후배들이 많이 나와주었으면 한다. 남성들이 힘있는 목소리로 소리를 할 때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예나 지금이나 소리 배우는 사람들은 여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물론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한 신재효도 진채선이라는 여자 수제자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조금은 섭섭한 게 사실이다.

다시 판소리 복원 얘기로 돌아가자면, 70년 8월 22일 한국일보사 강당에서 3시간 30분 동안 '변강쇠 타령' 을 발표하게 되었다.

'변강쇠 타령' 은 그전까지는 사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것에 내가 곡조를 붙인 것이다. 특유의 육담(肉談)이 노골적이기는 하지만 골계미에 있어서는 어떤 작품보다 탁월하다.

'변강쇠 타령' 때 관객과 언론의 호평을 받은 데 힘입어 '숙영낭자전' . '장끼전' . '배비장전' 등 열두 마당 중 소실된 작품들을 재창작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하게 되었다.

물론 70년 4월 '심청가' (6시간 30분), 71년 4월 '적벽가' (6시간), 71년 11월 '수궁가' (4시간) 등 완창 공연도 줄기차게 이어갔다.

하기 전에는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공연을 마치고 나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완창 판소리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만든 신작 판소리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72년에 발표한 '이순신 장군' 이다. 이 작품은 무려 9시간 40분이나 걸리는 대작 중의 대작이라 공연할 때 5명의 고수(한일섭.이정읍.김동준.김명환.김덕수)가 2시간씩 돌아가며 북을 쳤다.

창작에는 3년이 걸렸는데, 통영.한산도 등 이순신 장군과 관련한 곳들을 답사하는 한편 '난중일기' , 춘원 이광수의 '이순신' 등의 자료를 통해 사실에 충실한 대본을 만들고 곡을 붙였다.

또한 완창 공연에 앞서 동양라디오의 '여명의 가락' 프로그램에서 매일 아침 15분씩 미리 소개했다. 공연을 시작하며 나는 무대 한 구석에 그동안 참고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책들을 쌓아 놓았다.

"고증이 중요한 작품이라 중간에 생각이 안나는 대목이 있으면 참고하겠다" 고 관객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공연을 시작했으나 결국 책은 한 번도 펴지 않았다.

그날 공연장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찾아오기도 했다. 평소 이순신 장군을 존경해 온 박대통령은 때마침 현충사를 방문하고 있다가 우연히 라디오를 듣고 차를 돌려 곧바로 공연장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는 직접 무대까지 올라와 "참 수고하셨다. 점심이나 사 잡수시라" 며 '금일봉' 까지 주었다.

박동진<판소리 명창>

정리〓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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