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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사라진 팬플루트 주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부-부부 부 부-부부 부-부.'

바흐의 폴로네즈 선율이 뿌연 안개와 같은 팬플루트 소리를 타고 울려퍼진다. 사람들이 모여든다.

벤치에서 속삭이던 연인들도, 조잘거리며 지나가던 여고생들도. 봄날의 토요일 오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한구석.

20대 중반, 음대 졸업생 분위기의 연주자는 상당한 솜씨로 바흐의 명곡들을 하나씩 선보였다. 앞에 놓인 모금함을 둘러싼 청중은 조용히 빨려들고 있었다.

'빠바바 빵빵 카르카르 캉캉캉-. '

느닷없이 들려오는 전자악기의 굉음. 바로 옆 야외무대에서 대형 스피커를 동원한 공연이 시작된 것이다.

연주는 중단되고 청년은 떠나버렸다. 20여명의 청중도 하릴없이 흩어졌다. 지난 4월의 한 주말에 등장한 팬플루트 주자는 다시 대학로를 찾아오지 않았다. 음향 폭력이 쫓아내버린 낭만의 현장이다.

대학로가 변하고 있다. 문화의 거리에서 소음과 청소년 소비문화의 거리로. 우선 소음이 문제다.

마로니에 공원 야외무대에선 앰프의 볼륨을 한껏 올린 공연이 요란하다. 바로 앞 보도에선 주말마다 선교공연단의 밴드가 전자음을 힘껏 뱉어 놓는다.

차도의 경적과 버스 엔진소리를 압도해야 하니까. 문예회관 앞길에서 백댄서 연습생들이 틀어 놓는 대형카세트 소리도 경쟁적으로 커졌다.

문예회관 지하공연장의 연극에 지장을 주고 50m 떨어진 문예진흥원 강당에서 세미나를 할 수 없을 정도다.

이면도로로 들어서면 오락실.노래방.카페에서 쏘아대는 음악이 청각을 엄습한다. 퍼포먼스나 무용을 공연하고 바이올린.플루트를 연주하는 파리의 퐁피두 광장 같은 분위기가 나올 리 없다.

대학로의 극단들은 종로구청에 여러 차례 규제를 요청했다. 구청측 답변은 "환경소음규제법은 80㏈(데시벨)이 넘는 야외공연만 규제하고 있다" 는 것이었다. 80㏈은 계속 들으면 청력에 손상을 일으키는 공사장 소음 수준이다.

그래도 이런 소음은 신촌에 비하면 덜하다. 그러나 대학로는 상업.소비지구가 아닌 문화지구다. '너무 시끄러워서' 20대 중반만 넘어도 발길을 돌리는 신촌의 경우를 답습해서도 안된다.

이곳의 문화적 분위기를 대변하는 것은 30여곳에 이르는 연극공연장과 마음의 여유를 주는 마로니에 공원, 분위기 있는 찻집과 카페다.

그러나 요즘 정통연극은 파리를 날리고 공원은 시장통보다 붐빈다. 오감도.밀다원.마로니에는 사라지고 DDR.노래방.전자오락실.소주방.호프집.편의점.떡볶기집만 번성하고 있다.

10대 중반에서 20대 초반까지의 젊은 층이 거리와 상권을 점령해 버린 탓이다. 워크맨 이어폰을 꽂고 살면서 소음치 1백㏈이 넘는 전자오락실과 록카페에 익숙한 세대다.

이 고객들을 대상으로 대학로는 점점 시끄러워져가고 있는 것이다.

"낭만을 느끼기가 어려워졌다. 시끄럽고, 애들만 득실대고. " 대학로를 약속장소로 정하지 않게 됐다는 30대 회사원의 말이다. 명소치고는 외국인이 눈에 띄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인지 모른다.

선진국은 소음을 용서하지 않는다. 프랑스 파리에선 출력 5W이상의 야외 앰프를 사용할 수 없다. 타악기의 연주장소는 몽마르트 언덕으로 제한된다. 미국 뉴욕은 술집 음악소리가 거리로 새나오면 2만4천달러(약 2천7백만원)의 벌금을 물린다.

대학로의 낭만과 문화는 되살려야 한다. 소음을 규제하는 게 그 첫걸음일 것이다.

조현욱 문화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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