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이 있는 책읽기] 낭군 같은 남자들은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 박씨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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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군 같은 남자들은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 박씨전
장재화 글,김형연 그림
나라말,190쪽,8500원

고전소설 속 여성 주인공들은 아름답고 선량할 뿐 강한 능력과 의지를 지닌 인물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여성 주인공들은 당대의 유교적 가치관을 잘 지켜나가는 순응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 박씨 부인은 이들과는 다르다.

박씨 부인은 못생긴 얼굴 때문에 남편에게 버림받고 피화당에서 몸종 계화만을 데리고 홀로 생활한다. 그녀는 술법을 써서 허물을 벗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러자 그동안 부인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남편 시백이 그녀를 다시 찾아온다. 그 때 부인은 “아내의 심정을 모르고서 어찌 효와 충을 알 것이며 백성 다스리는 도리를 알겠느냐”며 당당하고 엄중하게 남편을 꾸짖는다. 또 청나라 적장 용골대를 도술로 한 방에 무릎을 꿇게 하는 비범함까지 보인다.

바로 이 장면에 박씨전이 추구하는 여성상이 극적으로 드러나 있다. 여성보다 훨씬 못하면서도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군림하는 남성들을 향해 영웅다운 면모로 당당하게 맞서는 여인, 당대 현실에서 주변적인 존재가 아닌 중심적인 존재로서 문제 해결을 이끌어내는여성상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 속에는 박씨 부인 외에도 뛰어난 여성들이 등장한다. 적국이긴 하지만 청의 왕비와 왕비가 뽑은 기홍대는 미래를 예견하며 뛰어난 도술을 부리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박씨 부인의 몸종 계화 역시 적장 용울대의 머리를 치는 용감성을 보인다.

그에 비해 소설 속 남성들은 박씨 부인을 아끼는 시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졸장부에 지나지 않는다. 청의 장수 용골대나 조선의 대신들은 한낱 아녀자의 말이라고 우습게 보다 화를 입는다. 당시 사람들은 여성에게 당하는 적국의 장수와 대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통쾌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 중심적인 이 소설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진정한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

무릇 모든 고전의 의미와 가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에 있다. 박씨전의 여성성은 단지 여성 주인공이 남성을 굴복시키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당대의 시대적 상황에 굴하지 않고 이에 맞서는 온전한 한 인간으로서의 당당함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최근 현대 여성들의 욕망이 투영된 드라마 속 인물들을 보면, 그녀들은 하나같이 신데렐라 콤플렉스 아니면 마녀 콤플렉스(자기보다 예쁜 여자의 행복을 볼 수 없어 짓밟는 여성)에 시달리는 인물이 대부분이다. 아름다운 외모, 착한 마음을 지닌 채 멋진 남성의 선택을 기다리는 여성 주인공들의 모습은 씁쓸하기만 하다. 조선시대보다 훨씬 자유로울 수 있는 현대 여성들이 오히려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꼴이다.

한 여성학자는 똑똑한 여성일수록 여자대학에 가야 여성으로서의 능력을 더 키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단순히 여자대학이라는 공간이 사회의 중심부에서 당당히 설 수 있는 여성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핵심은 여성 스스로의 자기 인식이다.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당당하게 현실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능력을 키워나가는데 있다. 그리하여 당당하게 얻은 자신의 성공 속에서 이웃까지도 돌아보는 나눔을 실천할 때 현대 여성은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긴급 구호 전문가 한비야씨는 세계 그 어느 곳이라도 구호의 손길이 필요하면 48시간 이내에 달려간다. 그녀가 달려가는 곳은 식량과 식수가 부족하고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위험한 공간이다.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그녀가 아름다운 이유는 자신의 일에 당당하고, 자신의 능력을 기꺼이 다른 이들을 위해 베풀기 때문이다. 한비야씨의 삶과 소설 속 박씨 부인의 삶은 다른 듯 같다. 그녀들의 삶을 곱씹어 보아야 할 때이다.

이수정(경기 양일고 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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