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반란' 남의 일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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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평소 아내에게 잘해야 늙어서 대접받는다" 는 술 좌석의 농담이 기성사실화하는 세태인가. 가부장적인 남편을 상대로 고령의 할머니들이 이혼소송을 내 승소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1949년 B씨(68)와 결혼해 6남매를 낳아 길러온 A씨(70)는 남편의 외도와 심한 구타에 시달려왔다. 남편은 결혼 초부터 다른 여자와 외도해 자식을 낳아 들여오는가 하면 A씨가 임신 중인데도 "정부(情婦)를 쫓아냈다" 는 이유로 폭행을 일삼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의 회갑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등 평소 아내 대접을 해주지 않았다. A씨는 결국 칠순의 나이에 남편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제기, 승소했다.

이번 사건을 맡은 서울가정법원 가사4부(재판장 金鮮欽부장판사)는 9일 "피고의 불성실한 혼인 생활로 가정생활이 파탄에 이른 만큼 두 사람은 이혼하라" 고 판결했다. 위자료 5천만원과 재산분할금 4억5천만원을 합쳐 5억원을 지급하게 했다.

지난 3일에는 한 중견기업 회장 부인(73)이 "남편의 구타·외도로 결혼생활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 며 남편을 상대로 이혼 및 1천억원의 재산분할 조정신청을 서울가정법원에 냈다.

또 1심 법원으로부터 "나이도 있으니 두 분이 해로하시라" 는 판결로 패소했던 70대 할머니는 지난해 8월 항소심에서 승소, 40여년 간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새 인생을 찾게 됐다.

그러나 "하루라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는 할머니들의 독립선언이 법원에서 모두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말 대법원은 중학교 영어교사 출신의 C할머니(77)가 낸 이혼소송을 "남편의 부당한 대우는 인정되지만 가부장적 권위는 혼인 당시 가치기준 등을 감안할 때 결혼생활을 파탄에 이르게 했다고 볼 수 없다" 는 이유로 기각했다.

서울가정법원의 한 판사는 "대부분 여성쪽에서 제기하는 황혼이혼은 평생 남편의 학대에 시달린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는 재산분쟁이 결부되는 경우가 많다" 며 "심리 결과 재산분쟁이 주된 목적이면 기각할 수밖에 없다" 고 밝혔다.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20년 이상 가정생활을 유지하다 결별하는 황혼이혼은 98년 7백78건으로 97년의 4백21건에 비해 84.7% 증가했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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