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내 인생 소리에 묻고 (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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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8. 정정렬 선생의 은퇴

정정렬 선생의 병세는 날로 악화돼 갔다.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는 동래온천에 내려가 황수(黃水 : 온천물)를 마시기도 했지만 별 차도가 없었고 다시 서울에 올라왔을 때는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쇠약한 상태에서도 제자들이 소리 연습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소리 한 토막만 듣고도 대번에 알아내 우리들은 선생님을 '귀신' 이라고 불렀다.

하루는 선생이 날 불러다 앉히고는, "너는 흔한 광대 소리꾼과는 다르니 좋은 스승을 찾아 가거라" 고 하는게 아닌가. 그 말만 남기고 선생은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댁으로 찾아가 봐도 어디 계시다는 말을 절대 안해주고, 선생이 간 곳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선생이 돌아가시고도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야 자신의 거처를 알리지 말라는 간절한 부탁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믿고 따랐던 스승을 하루 아침에 잃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무작정 정선생을 찾아 전국을 헤매고 다닐 수도 없고, 도의상 다른 스승을 찾아갈 수도 없고….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결국 경주로, 다시 대구로 떠돌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 경주에서의 일을 잊을 수 없다. 당시에는 권번이 많이 없어져 그전까지 주수입원이었던 소리 선생 노릇은 별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배경도 있고 이제는 소리 공부도 웬만큼 했다는 생각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소리를 한다는 것은 요새 유행가처럼 한 두곡을 토막 토막 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하기 시작하면 2, 3시간 동안 계속해서 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공연장에서 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동네 유지들이 부르면 요리집 방안 술상 앞에서 소리를 했다. 경주에는 최윤이라는 그 동네 유지가 있었는데, 9대 진사요, 12대 만석꾼인 양반이었다.

칠순이 넘은 분인데 나를 좋아해 "동진이, 동진이" 하며 즐겨 부르셨다. 그 분은 가세도 넉넉한데다 소리를 좋아해서 당대 명창들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한번은 이동백 선생과 여름 피서를 같이 갔었다고 한다.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고 해서 평소 궁금했던 것을 이선생에게 물었다.

"이통정, 이통정 소리하고 감찰(송만갑)소리하고 어느 쪽이 나은 것 같소?"

"아, 만갑이 그 놈 잘합니다. 할아버지대부터 소리를 이어받아 과연 그 소리가 진짭니다. "

이선생은 송만갑 선생에 대한 칭찬은 아끼지 않았으나 당신보다 낫다는 말은 절대 안했던 것이다.

최윤은 다음에는 송만갑 선생을 만날 기회가 있어 같은 질문을 넌지시 던져 보았다고 한다. 그랬더니 송선생 역시 대번에 손을 내저으며 "이통정 소리 좋지요. 아주 잘합니다" 라고 했다.

최윤은 내친 김에 또 다시 물었다. "내 궁금해서 그러니 솔직히 한번 말해 보시오. 정말 누구 소리가 더 나은지. " 송선생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있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통정이 목소리는 좋지만 그 소리의 근본이 없습니다. 여기저기서 받아 한데 모은 줄무데기(줄무더기)소리지요. 제가 하는 소리는 뼈대가 있다고들 합니다. "

전남 구례 태생인 송만갑 선생의 할아버지는 가왕(歌王)송흥록의 동생인 송광록이요, 아버지는 명창 송우룡이었으니, 송감찰은 3대를 이은 '송문(宋門)일가' 의 마지막 명창이었다.

그러나 원래 송씨 가문은 동편제의 가보를 이었으나, 송만갑 선생만은 서편제의 명창 정창업의 소리를 듣고 반해 서편제를 도입한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젊은 시절, "송씨 가문의 법통을 그르쳤다" 며 집에서 쫓겨났다.

내가 기억하는 송만갑 선생은 성품이 아주 인자한 분이었고 조선성악연구회 시절, 그분께 '흥보가' 의 한 대목을 배우기도 했다.

박동진 <판소리 명창>

정리〓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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