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포커스] 종교 지도자 추모기간에 수십만 명 “독재타도” 구호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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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지지한 몬타제리 가택 연금 중 사망

6월 대통령 선거 부정 의혹으로 촉발된 대규모 반정부 시위 이후 안정을 되찾아가던 이란 정국이 또다시 요동치고 있다. 보수파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에 반대하는 개혁파 지지자들이 자신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최고 성직자 호세인 알리 몬타제리(사진)의 19일 타계를 계기로 다시 가두 시위에 나서고 있다고 AFP 통신 등이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외신들에 따르면 이날 몬타제리의 고향인 중부 도시 이스파한에서는 추도객과 경찰이 충돌했다. 경찰은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슬람 사원 주변에 모여 있던 군중을 무차별 폭행하고 50여 명을 연행했다. 목격자들은 “경찰과 보안군이 여성과 어린이들을 포함한 시위대를 곤봉과 체인·돌 등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했다”고 주장했다.

앞서 21일에는 시아파의 이슬람 성지인 중북부 도시 쿰의 거리가 개혁과 변화를 상징하는 녹색으로 뒤덮였다. 개혁파 지지자 수십만 명이 몬타제리의 장례식에 맞춰 녹색 깃발을 흔들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6월 대선에서 아마디네자드와 경쟁했던 개혁파 지도자 미르 호세인 무사비 전 총리는 지지자들에게 장례식 참석을 촉구했다. 시위대는 몬타제리의 초상화를 들고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란 구호를 외치며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27일 시아파축제 앞두고 대규모 시위 비상

이란 성직자 호세인 알리 몬타제리(가운데 포스터 사진)의 장례식에 참가한 사람들이 21일(현지시간) 이란 중북부의 도시 쿰 시내를 가득 메우고 있다. 몬타제리는 이란 개혁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성직자로 19일 사망했다. [쿰 AP=연합뉴스]


◆개혁파 성직자 타계가 촉발제=몬타제리는 1979년 이슬람 혁명을 성공시킨 ‘국부’ 루홀라 호메이니에 버금가는 성직자였다. 호메이니의 제자이면서 그가 국외로 추방된 동안 이란의 이슬람 운동을 이끌었다.

85년엔 호메이니의 후계자로 내정됐다. 하지만 이후 호메이니의 대이라크 전쟁과 신정(神政) 정치에 반대하며 보수파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호메이니에 대한 비판의 강도도 높여 갔다. 결국 호메이니 후계자는 알리 하메네이로 바뀌었고 몬타제리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이후 가택연금 상태에서 인터넷을 통해 보수파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며 개혁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

당국은 일주일간 계속되는 몬타제리 애도기간 동안 시위가 격화할 것에 대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시아파 무슬림의 최대 축제 ‘아슈라’가 열리는 27일 대규모 시위가 벌어질 것으로 보고 바짝 긴장하고 있다. 개혁파에 대한 고삐도 바짝 조이고 있다. 아마디네자드가 의장을 맡고 있는 문화혁명위원회는 22일 개혁파 지도자 무사비를 이란 미술아카데미 대표직에서 해임했다.

이란에서는 6월 12일 대선 이후에도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개표 결과 아마디네자드가 이긴 것으로 발표됐지만, 그와 경쟁한 무사비 후보를 주축으로 한 개혁파가 선거부정이라며 거리로 몰려나왔다. 학생과 시민 수십만 명이 가세한 시위는 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최대 규모로 번지며 아마디네자드 정권을 위협했다.

이에 이란 당국은 군과 민병대를 동원, 시위를 무력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30명(이란 정부 발표. 개혁파는 70여 명 주장)이 죽고 4000여 명이 체포됐다. 이후 계속되는 정부의 탄압으로 대규모 시위는 주춤해졌지만 개혁파 진영의 저항이 완전히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다.

◆해묵은 보혁(保革) 갈등=이란 정국 혼란의 배경에는 해묵은 보혁 간 대립이 자리 잡고 있다. 89년 호메이니 사망 이후 이란 정치 세력은 크게 보수파와 개혁파로 양분됐다. 이슬람 우파그룹에서 출발한 보수파는 그룹의 정신적 지도자인 하메네이가 호메이니의 후계자로 임명되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보수 성향의 성직자와 혁명수비대·민병대·상인 등이 지지 기반을 형성했다. 이들은 전통적 이슬람 가치 수호와 문화적 교조주의, 외세 배격 등을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이슬람 좌파 그룹에서 태동한 개혁파는 언론 자유, 문화적 관용주의, 대외 개방 등을 내세운다. 지지기반은 지식인·여성·노동자·진보적 관료 등이다.

한국외국어대 서정민(중동아프리카학) 교수는 “상당수 국민이 개혁파에 지지를 보내는 데는 30%대의 실질 실업률로 대변되는 아마디네자드 정권의 경제 정책 실패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그러나 “30년 동안 계속된 이슬람 혁명 체제를 바꾸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며 “지금으로선 개혁파가 보수파를 누르고 정권을 교체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라고 진단했다.

유철종·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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