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코드 2000] 13. 한국인의 벗 '등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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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다운 벗도 내 곁을 떠날 수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인데 산(山)만은 언제 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그 외로운 봉우리와 하늘로 가야겠다."

김장호 시인은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는 수필집을 남기고 평생 산에 오르다 지난해 영영 산으로 떠났다.

'청산에 살으리랏다'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는 말처럼 한국인의 마음 속에 '쿵' 하며 직격해 들어오는 표현도 드물다.

산에 대한 우리의 마음 씀씀이는 의지와 체념, 삶과 죽음, 현실과 이상, 이승과 저승의 2분법을 단숨에 넘어선다.

멀리 높이 솟아 있어 숭배나 정복의 대상인 외국의 산과 지척에 아니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산에 대한 태도는 분명 다르다.

산에 올라가는데 목적이 있고 한계에 도전하며 정상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찾는 것. 서구에서는 등산을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는 별 뜻 없이 무작정 산을 찾는다. 인간 한계에 도전한다든가, 전인미답의 봉우리를 정복한다는 '도전과 정복' 의 목적 없이 우리는 산을 오르내리고 있다.

서구의 등산 개념을 어렴풋이 충족시킬 수 있는 우리 나라의 등산인구는 3백만명. 각급 학교.직장.지역.단체별로 활동하고 있는 등산 단체는 1만5천개 정도일 것이라는 게 산악계의 추산이다. 일본이 1천만명 정도이니 인구 대비 등산인 숫자 면에서 다른 나라보다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숫자는 취미 난에 당당하게 '등산' 이라 써 넣을 정도로 매주 가까운 산에 오르며 연간 5회 이상은 작심하고 먼곳의 산을 등정하고 있는 이들이다.

여기에 툭하면 친구 따라, 가족과, 혹은 홀로 산에 오르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국민이 거의 다 산악인인 셈이다.

꽃이 피거나, 단풍이 붉게 타오르면 그 꽃봉오리.단풍잎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어코 산을 뒤덮고야 마는 민족이 우리다.

산을 찾는 한국인이 많은 이유를 김승진(월간 '산' 편집장)씨는 "국토의 70% 이상이 산악인 자연적 환경 때문" 으로 꼽는다.

호남.김제평야 등 두어 군데만 빼고 눈만 들면 에워싸고 있는 산을 볼 수 있는 것이 한반도다. 그 산에서 땔 나무도 얻고 비탈을 경작해 먹거리도 얻었다. 정 궁하면 사회에서 두 손 툭툭 털고 일어나 빈손으로 들어가도 산은 우리 한몸을 족히 먹여 살렸다.

우리에게 산은 일상의 공간인 마을과 조금 떨어져 있으면서도 곧바로 삶의 터전으로 삼을 수 있는 제2의 일상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산에 '오른다' 하지 않고 '들어간다' 고 한다" 는 것이 김씨의 말이다.

이런 우리의 산은 초가집을 낳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만들고 추녀와 같은 버선코의 곡선을 낳았다. 빨랫줄을 걸면 중력으로 자연스레 처지듯 산등성이 같은 현수곡선의 문화를 낳았다.

나아가 "우람하기보다 안존하고, 거창한 게 아니라 오붓하고, 높게 솟고 깊게 파인 것이 아니라 곱상곱상하게 오밀조밀한 우리의 몸매, 우리의 얼굴이 바로 우리의 산에서 생겨났다" 는 게 김열규(인제대 국문학)교수의 말이다.

우리의 몸이요 심성이며 문화 자체가 산이니 정복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때문에 우리의 등산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행위다. 우리가 버리고 도회로 떠나온 옛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단군이 태백산(백두산)꼭대기에 연 신시(神市)로 돌아가 나와 산과 삼라만상이 하나 되는 행위다. 등산은 자연과 하나였던 민족의 뿌리로 되돌아 감이다.

'등산 반세기' 등 27권의 산악관련 저서를 펴낸 손경석(한일산악문화교류협회장)씨는 "단군신화나 신라 화랑들이 명산에서 심신수련을 하는 것에서 보듯 우리의 산악관(觀)은 민족의 뿌리에 잇대어 있어 등산을 단순히 서구의 개념으로 재단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고 분석한다.

그러나 우리의 등산 행태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등산을 빙자한 일부 몰지각한 놀이.먹자판, 나아가 패거리 문화에 대한 비판이다.

"지방자치단체.총선 때만 되면 우후죽순격으로 산악회가 생겨납니다. 등산 간다고는 하지만 어디 그게 산에 오르는 것입니까. 후보들이 도시락과 술을 제공하고 관광버스를 타고 가 산 언저리에서 먹고 마시는 등산 아닌 등산이 산과 사람과 사회를 더럽히고 있어 부끄럽습니다. "

국내 등반 2천6백회, 해외 등반 6백80회로 누구보다 산에 많이 오르고 있는 안경호(요산회 회장)씨는 잘못된 등산 관행을 꼬집는다.

'산절로 수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라는 시구처럼 마음 가짐이나 준비 없이 되는대로, 절로절로 산에 오르려는 우리의 관행이 오히려 산을 경시하고 더럽히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산은 마음가짐과 자세를 가다듬고 경건하게 올라야 우리에게 본연의 목소리와 삼라만상의 조화를 들려주며 건강한 심신을 돌려준다" 는 게 안씨는 물론 많은 산악인들의 지론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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