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현암사 조상원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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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양심있는 출판인은 출판 후의 사회적 파장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손익 계산만을 따져 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좋은 책을 낼 수 있을 지에 더 큰 가치를 두어야 한다는 얘기죠. "

지난 27일 별세한 현암(玄岩)조상원(趙相元.87)씨가 생전에 강조하던 말이다. 1951년 현암사를 창립한 고인은 스스로를 '책바치' (가죽신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갖바치' 에서 따온 용어)라고 부르며 반세기동안 오직 단행본 출판이라는 외길을 걸어왔다.

고인은 안동림(安東林)전 청주대 교수가 "출판계에서 누가 죽는다면 유일하게 울고 싶은 사람" 이라고 했을 정도로 우리 출판계에 큰 획을 그었던 인물이다.

특히 '법전' 과 이어령씨를 문필가로 이름을 떨치게 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등 각종 베스터 셀러로 번 돈을 '한국학' 등 출판계의 미개척 분야에 투입했다.

趙회장과 함께 '한국의 명저' 시리즈를 기획했고, 현암사의 30년 필자이기도 한 安씨는 "고인은 요리집 한번 가본 적이 없을 만큼 늘 검소하게 살柰? 자신은 굶을지언정 필자 인세나 거래처 대금 기일 약속을 어긴 적이 한번도 없을 만큼 신용을 칼같이 지켰다" 고 회고했다.

현암사 형난옥(邢蘭玉)주간은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지난해까지 직접 법전 편찬 작업에 참여한 '영원한 현역' 이었다" 며 "철두철미한 기질은 늘 우리 편집자들에게 귀감이 됐다" 고 말했다.

검소.신용과 함께 그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또다른 어휘는 '의지' . 이와관련, 邢주간이 전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 趙회장은 직접 컴퓨터를 배우려고 컴퓨터 한 대를 구입했다. 그러나 교육하러 온 컴퓨터 회사 직원이 趙회장을 보더니 '1주일 뒤면 컴퓨터를 반환할 것이고 대금도 받지못할 것' 이라며 그냥 돌아갔으나 정작 1주일 뒤에 이 직원은 컴퓨터 대금을 받아갔다는 것. 관련 책을 보며 혼자서 컴퓨터 지식을 배워나간 것이다.

평소에 趙회장은 '운명이란 자신이 내린 결정의 산물' 이라는 믿음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집안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으나 40여일을 하루 세시간만 자면서 공부해 1천2백여명 중 51명만 붙었던 보통문관시험(공무원 임용시험)에 합격한 일화도 있다.

현암사 창립 전 잠시 월간 '건국공론' 을 발행할 때 안동군수.대구시장.경주경찰서장 등을 맡으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길이 아니면 가지 마라' 는 신념으로 모두 거절하고 출판인생을 걸어왔다.

趙회장은 본래 풍수(風水)를 따지는 사람으로 자신의 묘자리를 미리 마련해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해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이 "훨훨 날고 싶다" 며 화장을 유언으로 남기자 자신도 화장을 택했다. 유골도 납골당에 안치되지 않고 31일 강화도 앞 바다에 뿌려진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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