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우린 속기만 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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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드라마 '바보같은 사랑' 의 남자와 여자는 불륜이다. 그러나 불륜이란 느낌으로 오지 않고 삶과 닿아 있는 속깊은 인간애라는 느낌으로 온다. 왜 그럴까. 제도보다 먼저인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여자와 남자는 아름답다. 그러나 성추행을 하는 남자와 여자는 추하다.

대표적인 한 시민운동가가 성추행 혐의로 구속됐다. 충격을 받은 시민들의 분노가 대단하다.

사건의 진상이야 좀더 지켜봐야겠지만 인권 보호를 최우선으로 삼는 시민운동가가 인권 유린을 한 데 대한 분노였다. 인권 유린이기에 사생활이라고 보호할 수 없는 것이다.

성추행이 문제인 건 성과 관련된 스캔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권 유린이기 때문이다. 성이 인간의 본성과 관계가 있다면 인간은 성을 통해 자기를 표현할 권리가 있고 그 성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도 있다.

부부 사이에도 강요할 수 없는 게 성 아닌가. 그러니 자기 의사에 반하는 성폭력은 인권 유린이고 그래서 처벌의 대상이다.

그 시민운동가와 총선연대를 함께 했던 박원순 변호사가, 도덕성을 바탕으로 일하는 시민운동가에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마치 자신의 일인양 백배사죄했다. 결석생이 있을 때 출석생이 야단맞는 형국이다.

그렇구나. 시민운동가에게 무엇이 있는가. 돈이 있는가, 권력이 있는가. 유일한 힘이 도덕적 힘이다. 그 힘으로 건강한 싸움을 해온 의욕적인 사람들이었다.

시민의 뜻을 개미처럼 성실하게 모아 모처럼 개혁의 주체로 주목받기 시작한 시민단체의 활동이 지극히 개인적인 이 사건으로 제약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다.

열심히 시민운동을 해온 그 운동가는 이로 인해 명예를 잃었다. 세우기는 어려워도 무너뜨리기는 한순간이라더니. 어쩌면 그는 의로운 꿈을 꿀 수는 있어도 다시는 의로운 일을 할 수는 없는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것이 시민운동의 도덕성이다.

성은 은밀한 것이어서 무시와 모욕이 더 수치스러울 수 있다. 은밀한 인권에 대해 문제 의식이 없는 자는 인권을 논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아직도 여성 문제는, 성과 관련된 문제는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고 믿고 있는가. 술김에 벌어진 형이하학적인 일은 인격과 무관하다고 믿는 그 인격은 분명히 발목을 잡힐 것이다.

우리는 젊은 세력은 여성 문제에 대해서도 진보적일 거라고 믿고 싶다. 성을 도구나 상품으로 삼는 일이 낯설 뿐더러 저항적일 거라고. 5월 17일 밤 광주에서 술판을 벌인 사람들이 여자를 끼고 놀지는 않았다고 변명하는 것은 그런 분위기를 알고 있는 것이다.

광주에서 술판을 벌인 사람들은 사실 참신한 도덕성으로 한껏 고무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술판은 임수경씨가 침묵만 했어도 영원히 가려질 사건이었다. 임수경씨는 1분도 채 안돼 술판을 떠서 그 상황을 자세히 모른다는 게 그 자리에 있었던 386세대의 변명이다. 궁금한 게 있다.

왜 임수경씨는 그렇게 황급히 술판을 뜨고, 그래서는 안되는 거라고 글을 올렸을까. 무슨 못볼 꼴을 보았길래. 약간의 술로 긴장을 풀고 자유롭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그런 술판이 아니었던 건 확실하다.

더군다나 그 술판은 그들이 계산한 자리가 아니었다. 당선 축하라는 이름으로 술집 주인이 부담했다는데! 그건 분명한 향응이다.

구태가 넘쳐난 판, 그러니 그들이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일 뿐이지 분별력 있거나 깨끗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 일이 정치 신인들의 희망의 싹을 자르는 계기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유일한 장점이었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었음을. 거기서 어렵게 시작해야 하는 것임을.

젊은 피들은 분명히 말했었다. 당내 민주주의를 일궈내겠다고,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당론보다는 소신에 따라 크로스 보팅도 할 거라고.

그런데 그렇게 말을 많이 바꾼 JP와, JP가 지명한 이한동 총재가 총리로 지명됐는데도 이의를 제기하는 젊은 피의 소신을 들어보지 못했다.

표결에서는 어떻게 할까. 한 사람 한 사람이 헌법기관인 그 참신한 사람들이 당론을 따를까, 소신을 따를까.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지켜보는 국민이 많다는 걸, 그것이 젊은 피가 수혈인지, 매혈인지를 가늠하는 첫 시험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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