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 왜 '개혁피로' 현상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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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엊그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국정개혁 피로' 현상을 지적하면서 경제관료들을 질책했다. 인체의 피로현상은 상식적으로 두가지 이유에서 발생한다.

누적된 과로나 스트레스에 의한 외부요인과 신체 저항력 또는 기본체력 부족으로 인한 내부요인이다.

국정개혁이 국민에게 피로감을 주었다면 이는 외부적 요인에 속한다.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일치단결해 개혁작업을 벌인 노력 끝에 생겨나는 건강한 피곤함이 아니라, 개혁이라는 폭탄이 누구를 향해 어디로 터질지 모르는 불가측성 때문에 발생하는 압박감 또는 스트레스의 누적에 따른 정신적 피로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왜 개혁이 국민에게 압박이나 스트레스를 주는가. 그 첫째는 개혁 추진과정의 정략적 분위기 탓이라고 본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망각하고 있겠지만 지난해 중앙일보 언론탄압사태와 관련해 문일현씨의 이른바 '언론장악 보고서' 가 폭로되면서 세상이 떠들썩했다.

문씨의 보고서는 총선을 앞두고 정국을 주도하기 위해선 3대 신문 중 중앙일보를 택해 본때를 보여 언론을 길들이지 않고서는 정국을 주도할 수 없다는 이른바 언론 길들이기 개혁론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검찰조사로는 개인적 소견이고 보고서를 전달받은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본 적도 받은 적도 없다고 해 이 사건은 지금껏 오리무중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나 자신 중앙일보 사태가 언론장악문건에 따른 정권의 계획된 길들이기 시도였는지에 대한 확증은 없지만 그 개연성은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다.

당시 상황을 지켜본 사람이면 개혁과 길들이기의 상관관계에 대해 긴가민가 하는 의혹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피로한 것이다.

언론장악문건 사태와 비슷한 시기에 개혁추진 이너 서클이라 할 한 정치학자가 작성한 '정국주도권 회복과 총선대비 국민적 지지기반 재강화방안' 이라는 장문의 재벌개혁보고서가 구전(口傳)된 적이 있다.

내용은 이러했다. 경제회생으로 혜택을 보는 상층집단은 정부.여당을 반대하는 세력이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아래서 고통당한 중산층과 서민의 반감이 예상 외의 과도한 반발을 부를 수 있으니 재벌 단죄를 통해 국민적 지지 반등(反騰)과 야당 고립, 영남지역감정 잠복, 총선승리 발판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보고서가 정권핵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지만 곧 이어 대한항공 3부자에 대한 국세청의 검찰 고발과 몇몇 재벌 일가의 상속.증여 조사 등이 보고서 내용과 유사한 방향으로 진행됐다.

언론이든 재벌이든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 죄가 있으면 단죄해야 한다. 개혁을 하되 법과 제도에 따라 양명(陽明)하게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법과 제도가 잘못됐다면 합리적 절차에 따라 여론의 지지를 얻어 고쳐야 한다. 그러나 개혁이 정략적 구도에서 출발하고 개혁 목표가 총선 승리나 특정집단.단체를 길들이기 위한 전술적 가치에 비중을 둔다면 그런 개혁을 보는 국민들로선 피로감을 넘어선 혐오감 또는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개혁 피로감의 두번째 요인. 개혁주체 또는 정권실세들이 드러내놓고 편갈이를 하는 최근 행태 탓에 더욱 피로가 누적된다고 볼 수 있다.

총선 후 등장한 정권 내부의 발언들 중 청와대 한 수석의 '소수 정의론' 이나 동교동 실세들의 한 모임에서 나온 '피바람론' , 그리고 민주당 연찬회의 내부 보고서라는 '국정방해세력론' 등이 모두 개혁 편가르기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개혁주체나 집단의 의식구조 속에 우리만이 개혁을 할 수 있다는 독선이 엿보인다. 그래서 우리를 비판하고 동조하지 않는 세력은 모두 국정방해세력이고 우리가 몰리면 피바람이 불 것이니 내부 결속을 다짐하자는 맹세로 풀이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개혁이라도 기존 체제를 바꾸고 새 체제로 가자면 내부 비판이 있게 마련이고 반대세력도 존재할 수 있다. 합의와 포용으로 개혁의식을 확산시키면서 건전한 비판은 받아들여 개혁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민주사회의 개혁작업이다.

개혁의 본체는 뒤에 숨고 개혁추진세력은 껍데기를 내세워 부리다가 개혁 차질이 생기면 껍데기에 덤터기를 씌우는 방식이어선 국민이 진정한 개혁이라고 보지 않는다.

안과 밖이 다르지 않고 말과 행동이 따로 놀지 않으며 나만 정의고 너는 불의라는 편가르기가 없어야 누구나 개혁에 흔쾌히 동참하고 개혁에 피로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개혁을 음산한 정략적 도구로 삼지 않고 개혁이 곧 국가발전이라는 양명한 공감대로 추진할 때에야 국민은 피로감은커녕 건강한 활력을 되찾을 것이다.

권영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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