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풍류탑골 (3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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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32.문인들의 고스톱

젊은 문인들이 모이면 즐겁다. 서로의 속옷이 어떤 색깔인지, 그리고 그것은 언제 갈아 입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이미 서로에게 탓 될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탑골을 시작하고 얼마 안됐을 때에 김정환 시인이나 평론가 고(故)채광석씨 등과 거의 떨어지지 않고 어울려 다니던 많은 문인들 중에서 외국어대 3총사가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재현.현준만씨는 평론가로, 김남일씨는 소설가로 문단에 나오면서 문학운동에 한바탕 풍운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재현씨는 노동문학에 대한 날카로운 평론을 썼고 현준만씨는 '김지하론' 을 비롯해 문제적인 평론을 썼던 민중문학의 맹장들이었다.

그런데 문학에 대한 이론을 펼칠 때보다 어쩌다 여흥으로 하는 고스톱에 대한 이야기는 훨씬 신랄하고 재미가 그만이었다.

"너 재현이, 니가 인간이냐□ 아무리 고도리를 치다가 돈을 잃었기로 개평 하나 주지 않고. 난 임마 그날 이문동에서 수원까지 걸어갔어. 알아!"

"남일이 너한테 누가 걸어가라 했냐고! 같은 그림 찾아서 모아보면 점수가 되고 너는 안돼서 돈을 잃은 것인데 무슨 불만이 많냐고! 야 우리도 수박통(머리) 깨지도록 연구해서 치는거야. 머리가 나쁘면 발도 힘들고 몸도 피곤한거야. 괜히 비 십끗짜리 끝까지 들고 광 먹으려고 하니까 그렇지. 그 판은 육백이 아니고 고도리야 고도리. 새잡는데 괜히 빗자루 틀어쥐고 벌벌 떨며 민폐나 끼치고. "

그쯤이면 김남일씨가 이재현씨한테 다시 한번 피바가지 쓰는 것으로 판명이 난다. 그러나 김남일씨가 그냥 물러갈 수 있는가.

"우리 아버지가 인간성이 나쁜 애들하곤 놀지 말랬는데, 아버님 말씀을 안들은 것은 내 죄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까지 인간성 나쁜 것은 니탓이야 임마. "

"재는 아무 때나 인간성이래. 야 고도리가 인간이냐, 화투판이지. 그리고 너는 걸어가도 싸. 내가 너한테 차비하라고 천원 줬냐? 그 돈으로 어떻게 해보겠다고 또 덤벼서 그렇게 된거고. 너야말로 고도리의 과학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발 고생이나 몸 고생을 통해서 겨우 알 수 있는 터무니 없는 인간주의자야. 총으로 사람 죽인 전모한테나 가서 인간성 회복 플래카드 들고 왔다갔다 하시지. "

이쯤이면 그야말로 인간성 아름다운 김남일씨는 얼굴이 벌개지고 '하이 참, 하이 참' 등의 탄식의 소리만 내게 된다. 그때 쯤 현준만씨가 등장할 타임이다.

"야 남일아. 너 바쁘지 않으면 종로서적 2층에 가서 책이나 몇 권 사서 공부해라. 가서 '과학적 고도리 이렇게 정복하라' 편하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법' 이라는 명상서와 '고도리경(經)' 을 사서 5년만 수도해. 그러면 우리가 놀아줄게, 우리도 수원이 아니라 대전까지 걷고 싶거든. "

"너 현준만 그러는게 아녀. 너 청년문인 MT 갔을 때 돈 좀 땄다고 그럴 수 있어. 돈 싹쓸이하고 개평 좀 달래니까 점퍼 속 주머니에 그 돈 다 넣어두고 엎어져서 잤지. 잠자는 사이에 누가 지 주머니에서 돈 빼갈까봐. 너도 인간성이…. "

"야 그러면 그렇게 어렵게 돈 땄는데 뭐하러 돈을 돌려 줘. 그러려면 하지 말든가. 괜히 하고 나서 쓸데없는 불만이나 털어놓고. 그러니까 운동을 할 때는 운동을 하고 고도리를 칠때는 고도리를 치고 그래야지. 운동인지 고도린지 구분이 안되면 어떻게 하냐고. 내가 쓰고 이재현이가 감수했으니 책이나 사봐. 나도 인세 좀 챙기게. "

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렀다.

서점에 가면 그날 장난치면서 한 말이 실제로 실현되어 있다. 고스톱이나 카드 치는 방법에 대한 책들이 실제로 많이도 나와 있으니.

한복희 <전 탑골주점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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