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북한… 지금 변화중] 15. '실력전' 벌어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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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북한 언론매체들은 양강도 대홍단군 김성진 당책임비서를 소개할 때마다 이런 수사(修辭)를 쓴다.

'온 나라가 다 아는 대홍단군 책임비서' . 북한은 지난 3년간 모든 당원들에게 백두산 인근 산골짜기 간부인 그를 따라 배울 것을 촉구해 왔다.

중소형발전소 건설, 주택문제 해결, 감자농사에서 성과를 거둔 자력갱생의 모범생인 그를 소재로 영화까지 만들어 보급했다.

김정일(金正日)총비서도 1998년 10월 1일 대홍단군종합농장 방문길에 그에게 '진짜배기 혁명가' '참된 당일꾼' 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는 테크노크라트들의 실력향상 없이는 경제재건도 어렵다는 북한 당국의 고민을 보여준다.

요사이 북한에선 보통강전기공장 초급당비서 김응수, 승리자동차종합공장 책임비서 정길영, 태천수력발전종합기업소 지배인 김창룡, 자강도 강계시당 책임비서 이득남 등이 실력있는 간부의 전형으로 꼽힌다.

'실력가의 전형' 으로는 요즘 인물뿐 아니라 정권수립 초기 및 50년대 천리마운동 시기에 활동한 강영창 과학원장(65년 사망)등도 부각되고 있다.

북한은 올해를 아예 '실력전(實力戰)' 의 해로 규정하고 간부의 실력양성을 국가 아젠다로 설정했다.

체제와 정권에 대한 충성과 혁명성, 사상과 함께 간부들이 실력 및 전문성을 갖출 것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신문이 지난 1월 22일 사설에서 "일꾼들은 혁명성이 강해야 할 뿐만 아니라 높은 실력을 가져야 한다" 고 강조한 것은 신년 공동사설이 실력전을 강조한 데 따른 후속 조치였다.

당 기관지가 나서 간부의 실력양성과 학습을 강조하는 것은 김정일 총비서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노동신문은 金총비서가 "일꾼들은 직권이 아니라 실력으로 맡은 일을 해 제끼는 실력가가 돼야 한다" 고 역설한 것으로 보도했다(1월 23일).

실력전의 선두에 金총비서가 서있는 것으로 북한 매체들은 보도한다.

그가 산업현장 방문 때 '실력' 을 보여왔다면서 간부들에게 이를 따라 배울 것을 촉구하는 식이다. 그가 경제지식.과학기술.컴퓨터를 강조하고 있다는 보도도 자주 눈에 띈다. '김정일식 사업방법으로 일하라' 는 것이 노동당의 주문이다.

특히 경제사업에 필요한 실력이 중시된다. 산업현장에서 구태의연한 지도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노동신문은 "지금은 경제사업을 치켜세우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참된 충신" (1월 16일)이라고 강조하기까지 했다.

정부기관지 민주조선의 한 사설은 "일꾼들은 누구나 다 혁명적 학습기풍을 철저히 세우고 언제나 책을 손에서 놓지 말고 한가지 지식이라도 더 얻기 위해 분초를 쪼개가면서 애써야 한다" 고 촉구했다(1월 14일). 김일성.김정일 저작 및 당문헌 등의 학습은 언제나 기본이지만 최근엔 과학기술과 정세 학습.문학작품 독서 등도 중시되는 점에서 변화가 엿보인다.

민주조선은 "최신 과학기술 지식을 습득하는데 주력하며 역사와 지리, 문학과 예술, 보건.체육을 비롯한 사회생활 전분야의 지식을 습득" 할 것을 간부들에게 주문했다(3월 15일). '간부들이 주민에게 인정받고 호응을 얻으려면 여러 방면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북한이 이처럼 실력양성에 부심하고 있는 것은 간부들의 실무능력이 현실변화에 미처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해외유학을 제한해 온 데다 그나마 소련.동유럽 사회주의정권의 붕괴 이후 문을 닫아걸고 있었기 때문에 지식.정보 교류가 제한되고 간부들의 퇴화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요즘 들어 경제관리.기술분야 해외연수의 필요성을 느끼고 국제기구나 비정부기구(NGO)들에 타진하고 있으며 이미 부분적으로 연수가 실행되기도 했다.

북한 경제관료.기술자들의 해외연수는 실력전 바람을 타고 앞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북한의 현실은 경제개혁 초기에 실력있는 테크노크라트 부족으로 고생했던 중국의 예를 떠올리게 한다.

특별취재반〓유영구.최원기.정창현.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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