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욱의 경제세상] 손익계산서는 없는 세종시 논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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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영화 ‘십계’를 찍을 때 일이다. 제작비가 많이 든다고 제작자가 자꾸 불평하자 감독이 이렇게 되받았다. “정 그렇다면 오계만 가지고 개봉합시다.” 물론 영화는 십계로 완성됐다.

송년회 철이다. 어딜 가든 세종시가 화제다. 격론이 벌어질 때도 있다. 그때마다 나는 꿀먹은 벙어리다. 고백하건대 잘 몰라서다. 추진 과정과 쟁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안다. 하지만 행정부처만 옮기는 것, 완전 백지화하는 것, 일부만 옮기고 자족 기능을 보태는 것 중 어느 게 옳은지는 도통 모르겠다. 의견이 있으려면 근거가 있어야 한다. 부처 이전 비용은 얼마인지, 나라에 어느 정도 보탬이 되는지는 최소한 알아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지난 정부에서든 이 정부에서든 이 데이터가 없다. 그러니 분석은 없고 주장만 무성하다. 내가 토론장 말석에라도 끼지 못하는 이유다. 토론하는 사람들도 겉돌긴 마찬가지다. 한쪽은 균형발전과 수도권의 과밀화 해소를, 다른 쪽은 행정 비효율성과 국가경쟁력 약화만 떠들다가 끝난다. 비용과 편익은 같이 고려돼야 한다는 상식은 온데간데 없다. 데이터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 여론조사는 하나마나다.

전적으로 정부 탓이다. 원안대로든 뒤집기든 정부는 덜렁 결정부터 했다. 그런 후 논거를 찾아 끼워 맞추려 했다. 일을 처리하는 순서가 잘못된 것이다. 세종시는 처음부터 그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때 수도 이전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만한 걸 들고 나오려면 정말 준비 많이 해야 한다. 최소한 비용과 편익을 따진 손익계산서는 있어야 했다. 균형발전과 수도권 과밀화 해소의 편익이 더 크니 수도를 옮기겠다고 공약해야 했다. 그게 상식적인 사람의 정상적인 행태 아닌가. 하지만 그에게는 손익계산서가 없었다. 당선에 도움될 것 같기에 그렇게 주장했을 뿐이다. 국익은 사라지고 정략만 있었다는 얘기다. 약식이나마 계산서를 만든 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였다. 수도 이전이 위헌으로 결정 난 후에도 노 전 대통령의 행태는 변하지 않았다. 정부 부처만 옮긴다면 손익계산서는 새로 만들어야 한다. 행정 비효율성이 비용 부문에 추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질 않았다. 계산서는 안중에도 없었다. 위헌 결정 후 불과 4개월 만에 행정부처 이전을 발표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 정부라고 다를 게 없다. 원안을 뒤집겠다는 결정부터 내렸다. 그런 후 비용과 편익 분석을 시작했다. 세종시 원안과 대안의 비교분석 결과가 나온 건 불과 며칠 전이다. 정부가 처음부터 설득력 있는 대안을 들고 나오지 못한 까닭이다. 물론 지난 정부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이 크다. 하지만 그렇다고 면피되는 건 아니다. 그럴수록 더 철저하게 준비했어야 했다. 잘못 설계된 역사의 궤도를 다시 놓는 건 정말 힘들기 때문이다. 최소한 행정 비효율성, 경쟁력 저하, 부처 이전 등의 비용을 몽땅 계산한 후 균형발전과 과밀화 해소의 편익과 비교하는 작업을 진작 했어야 했다. 이걸로 국민을 설득해야 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여당 국회의원이 “정책을 만들 때는 과학적이고 계량화된 개념을 써야 한다”며 질책했을까.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업 유치 운운하다가 “서울이 아닌 지역의 기업은 유치하지 않겠다”고 말을 바꿨다. 부처 이전 백지화를 외치다가 요즘은 “하나도 안 갈 수도, 다 갈 수도 있다”고 한다. 정부 스스로 확신이 없는 탓이다. 그 밑바탕에는 손익계산서가 없기 때문이다.

중앙이 이러니 지방인들 별 수 있겠나. 앞뒤 재지 않고 일부터 저지르는 건 판박이다. 광장부터 만들어 놓고 무슨 용도로 사용할지 토론회를 열겠다는 서울시장, 청사를 대궐처럼 만들어놓은 성남시장의 행태 말이다. 대통령은 정말 잘 뽑아야겠다. 사족이지만 나는 제작자 편이다. 비용이야 얼마가 들든 무조건 십계를 만들겠다는 감독의 옹고집보다 수입까지 같이 계산하면서 십계 제작으로 돌아선 제작자의 합리성이 맘에 들어서다. 원안 고수든 수정이든 편익이 더 큰 쪽이 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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