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북한… 지금 변화중] 14. 체제단속도 세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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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사상교양사업에 힘을 넣어야 한다. "

지난해 6월 1일 노동신문.근로자 공동논설은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모기장을 든든히 쳐야 한다" 며 이같이 강조했다.

밀수.암거래.매음.도박 같은 암적 현상은 아무리 사소해도 싹부터 잘라야 후환이 없다는 대목도 들어 있었다. 개혁.개방에 환상을 가져선 안된다는 지적도 물론 빼놓지 않았다.

'모기장' 론을 내세운 이 논설은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에 나왔다. 그로부터 1년이 경과한 요즘 북한에선 '잘 살아보세' 를 위한 변화가 눈에 띄게 늘면서도 동시에 사상교육이 여전히 강조되고 있다.

'모기장' 론은 신선한 공기(경제교류)가 외부에서 유입되는 것은 필요하지만 모기(자유화 사조)는 적극 막아야 한다는 논리다.

북한이 변화 속에서도 문단속을 고집하는 것은 '총칼 앞에서도 끄덕없던 사회주의(소련.동유럽)가 사상문화적 침투에 의해 물먹은 담벽이 쓰러지듯 무너졌다' 는 생각이 북한 수뇌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1996~97년 '고난의 행군' 기간에 사정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체제 지키기 없이는 경제재건에 나서기도 어렵다는 뜻에서였다.

97년 신년 공동사설은 '인민들이 풀죽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사회주의를 고수하겠다' 고 선언해 절박성을 드러냈다.

그해 2월 황장엽(黃長燁) 당비서를 시작으로 장승길 이집트대사 등 고위관료들의 망명이 줄을 이어 큰 충격을 주었다.

더군다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하고 유민(流民)과 범죄자가 늘면서 사회기강이 무너져 내렸다.

97년 8월 평양역 광장에 나붙은 '낟알을 훔치며 팔고 허실하는 자들을 엄격히 처벌함에 대하여' 라는 포고문이 이를 잘 보여준다.

포고문 1조는 "낟알을 훔치는 행위를 절대로 하지 마라!" 였다. '총살형에 처한다' 는 처벌규정이 붙어 있었다.

당시 청소년들의 해이현상도 큰 문제였다. 청년동맹 기관지 '청년전위' 97년 9월 4일자는 "청년들이 일시적 난관 앞에서 제 살 궁리나 하면서 조직규율과 노동행정규율을 어기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고 지적할 정도였다.

체제 추스르기에 나선 북한 수뇌부가 역점을 둔 것은 고위간부에 대한 검열사업이었다. 검열은 김정일(金正日)총비서의 친동생인 김경희 당부장(무임소)과 남편 장성택 당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주도했다.

97년 9월 서관희 농업비서, 이병서 은별무역회사 총사장, 함운건 사회안전부 부국장, 최현덕 청년동맹 비서 등 고위간부 10여명이 평양 시내에서 공개 총살된 것은 체제 단속의 극치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들에게는 '부정축재와 반당.반혁명혐의' 가 붙었다.

나진.선봉 개방지구를 책임지고 있던 金총비서의 측근 김정우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부패혐의로 숙청되기도 했다.

한편 金총비서는 97년 자신이 총비서에 취임한 직후 전국청년동맹선전일꾼회의(10월).전국여맹선전일꾼회의(11월).농근맹전원회의(12월)등 집회를 잇따라 열게 하고 사상교양을 강화하도록 조치했다.

문단속이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판단한 그는 98년 10월 30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만나 금강산 관광과 서해안 공단 조성에 합의함으로써 대외개방 적극화의 채비를 하게 된다. 2년간의 체제 굳히기에서 무게 중심을 경제재건 쪽으로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외부사조 유입을 북한 내부를 와해하는 사상적 '트로이목마' 로 보는 북한 당국의 시각에는 변함이 없다.

한화경제연구원 양범직 책임연구원은 "북한은 대외교류를 확대하면서도 내부 안정에 영향을 줄 정도로 외부사조 유입이 문제가 되면 가던 걸음도 멈출 수 있다" 고 전망했다. 북한이 아직까지는 살얼음판 걷기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특별취재반〓유영구.최원기.정창현.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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