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코드 2000] 11. 노래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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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노래를 못하면 장가를(시집을) 못 가요 아 미운 사람/장가를(시집을) 가더라도 아기를 못 낳아요…."

20년 전만 하더라도 동창회나 회식.집들이에서 술잔이 몇 차례 돌고 흥이 무르익으면 어느덧 사회자가 일어나 콜라병에 꽂은 숟가락을 마이크 삼아 한 명씩 돌아가면서 노래를 권했다.

아니 반강제적으로 시킨다는 표현이 옳다. 이렇게 손바닥이나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불러왔다.

음정과 박자를 무시하고 끝까지 부르는 용기있는 '음치(音癡)' 들도 간혹 있었다.

가사를 몰라 중도 하차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좌중에서 기어코 도와주곤 했다. 강압적인 분위기에 못이겨 동요나 군가를 부르고 앉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인들은 어딜 가나 모이면 노래 부르는 것을 즐긴다. 성악가들도 대중가수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민족은 예부터 가무(歌舞)를 좋아하는 민족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다.

사계절이 뚜렷해 계절이 넘어가는 절기마다 축제가 있었다. 또 금수강산에 사는 민족이라면 낙천적 성격의 소유자에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풍류를 즐기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다.

여기에다 오랜 농경사회의 전통으로 이웃끼리 일손을 도와가며 사는 집단 노동이 발달해 여럿이 함께 부르는 노동요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노래방(정식 명칭은 '노래연습장' )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초. 70~80년대 룸살롱의 가라오케가 중년 남성의 퇴폐적 음주문화의 상징이라면 노래방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맨 정신으로도 출입하는 가족적인 사교장이다.

원맨 밴드에게 신청곡을 적어 부탁하거나 카트리지식 테이프를 한참 동안 찾아서 틀어주던 가라오케는 옛날 얘기가 돼 버렸다.

노래방에서는 리모컨으로 즉시 신청곡을 부를 수 있다.

또 가사만 있으면 얼마든지 노래를 부를 수 있고 노래의 수준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친다는 장점이 있다.

송도영(서울시립대.도시인류학)교수는 "노래방은 가라오케와 달리 값싸게 노래를 부를 수 있으며 술을 마시지 않고도 대낮부터 즐길 수 있다" 며 "음주의 공간과 노래의 공간이 분리된 것에 주목해야 한다" 고 말한다.

또 "대도시 한복판에서 노래방만큼 손쉽게 여가활동을 즐길 만한 공간이 없다" 며 "TV에서 유행하고 있는 최신곡을 부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고 했다.

노래방 기기는 관광버스와 군내무반을 점령했고 심지어는 미술 작품의 오브제(작가 이불의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 수상작)로도 등장했다.

한때는 택시에까지 노래방 기기가 설치되기도 했다.

김창남(성공회대.신문방송학)교수는 "노래방은 성인용 가라오케를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려 청소년층까지 확대시킨 문화상품" 이라고 분석한다.

가라오케가 '밤의 은밀한 문화' 라면 노래방은 낮과 밤이 따로 없는 열린 문화다.

노래방은 왜색문화와 동일시되던 가라오케를 우리 것으로 만들어 '전국민의 가수화' 에 성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노래방을 찾는 첫번째 이유로 꼽는 것은 스트레스 해소다. 거대한 산업사회의 중압감에 억눌린 사람들이 퇴근 후 노래방에서 일상 탈출을 시도한다.

노래방 등장으로 TV 가요 프로그램에는 가사를 자막으로 처리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또 '도전!주부가요스타' 등의 프로가 인기를 끌면서 주부를 대상으로 한 노래학원이 성업 중이다.

'음치' 교정을 위한 학원도 등장했다.

음악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악보 보고 제대로 노래 부를 줄 모르는 세대들 사이에서 뒤늦게 노래로 자아를 표현하려는 욕구가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에코 효과와 작은 볼륨으로 지탱해주는 멜로디 덕분에 누구라도 '스타' 가 될 수 있다.

혼자 노래방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노래방은 직장 동료나 친구.가족에 대한 소속감을 강화하면서도 노래 선택과 표현에 자유를 누리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절충적 형태다 . 하지만 무한한 자유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노래방에도 엄연한 '규율' 이 존재한다.

2곡 이상을 연이어 부르지 않는다든가 다른 사람이 부른 노래를 다시 부르지 않는다. 노래가 끝났을 때는 물론 1절이 끝나도 박수를 쳐야 한다.

이러한 불문율은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균등하게 주고 노래의 반복으로 인한 지루함을 막기 위한 것.

박수만 제때 친다면 다른 사람이 노래 부를 때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거나 다음 노래를 찾기 위해 목록을 뒤적거려도 무방하다.

집단적 유대감 형성을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는 잠시 접어두고 모두가 함께 즐길만한 노래를 불러야 할 때도 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중년 남성이 테크노풍의 가요를 부르거나 20대 여성이 흘러간 트로트 가요를 선택하기도 한다.

노래방의 등장은 대중가요의 소비뿐만 아니라 생산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듣는 가요에서 부르는 가요로 옮겨간 것이다.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음역(音域)도 점점 좁아진다.

신세대를 겨냥해 댄스풍의 트로트가 등장했다. 트로트가 '전통가요' 로 격상되면서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도 노래방 덕분이다.

육체적.정신적 피로를 달래주면서 노동에 활력을 불어넣던 한국인이 숨은 노래 실력을 노래방에서 마음껏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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