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돈독에 대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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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난다 긴다 하는 펀드 매니저라도 증권투자로 돈을 불리는 것은 결국 원숭이가 다트(dart)판 과녁을 맞히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세계 증시를 좌지우지하는 뉴욕 월가에서 들을 수 있는 투자 격언 가운데 하나다. 아닌게 아니라 천년 만년 돈을 긁어 모을 것 같던 퀀텀펀드의 조지 소로스, 타이거펀드의 줄리안 로버트슨도 지금은 맥없이 나가 떨어졌다.

돈 벌 확률을 컴퓨터로 계산해보았더니 뉴욕 양키스 야구단의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잡아내는 확률과 별 차이가 없더라는 통계도 있다.

요즘 국내 증시나 벤처업계를 보면 실감이 난다.

거품이 꺼진다고도 하고 옥석(玉石) 가리기가 진행된다고도 하는데 다른 쪽에서 보면 사회의 '돈독' 이 빠지는 과정이다.

뚜렷한 수익 없이 흥청대는 자금으로만 굴러가다가 하루 아침에 테헤란 밸리를 떠나는 벤처들이 적지 않고, 뮤추얼 펀드에 이어 은행의 단위금전신탁까지도 원금을 까먹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세상에, 증권 투신사도 아니고 은행도 고객의 원금을 축내다니 하고 어이 없어 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시원찮은 은행과 상대했다가는 예금도 날릴 수 있다.

가장 보수적이어야 할 은행들이 경쟁적으로 단위금전신탁 판매에 나섰던 것은 벤처.코스닥 열풍 속에 얼마나 돈독들이 올랐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뮤추얼 펀드를 건설회사 공사판 벌이듯 굴릴 수 있었던 것이나, 원금을 손해 본 펀드를 청산하기도 전에 펀드 매니저가 또 다시 억대 연봉을 받고 다른 곳으로 스카우트 돼 가는 것이나 다들 돈독이 받쳐주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정부도 나만은 돈독이 안 올랐다고 빠져나갈 처지가 못된다.

시중에 돈을 많이 풀어놓은 상황에서 마치 벤처와 코스닥만이 우리 경제의 대안인양 몰아가지 않았는가. 주가가 차분히 올라주었으면 여러 가지로 잘 풀렸을 텐데, 시장이 냄비니 코 꿰이는 경우가 많다.

돈독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잘 쓰면 돈독이야말로 사회를 뛰게 하는 활력소다.

미국 실리콘 밸리를 만든 것은 스탠퍼드 대학의 두뇌와 이를 사업으로 연결한 전문가 집단의 네트워크였지만 이들을 뛰게 만든 인프라는 스톡옵션과 나스닥이다. 백만장자.억만장자가 되려는 꿈에 지금도 실리콘 밸리에는 자금.인력이 몰려든다.

그러나 실리콘 밸리에서 어중이 떠중이가 발을 붙일 곳은 없고, 나스닥에서 묻지마 투자로 다치지 않는 경우란 거의 없다.

돈독을 다스리는 엄격한 규율이 있기 때문이다. 벤처로 출발해 나스닥에서 뜨려면 한마디로 기업 내용을 몽땅 까보여야 한다.

기술.자금.사업전망.경영진.주주 등 모든 기업정보를 항상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고 회계감사를 매번 철저히 받아야 한다. 나스닥에서 한번 떴다고 한몫 단단히 챙겨 기업을 떠났다가는 다시는 그 판에 발을 못붙인다.

고액 연봉을 받고 이 직장, 저 직장 옮겨다니는 최고 경영자들도 다 검증된 기록과 평판이 있고 나름대로의 규율이 있다. 하루 아침에 전혀 엉뚱한 곳으로 튀며 '변신' 이라고 포장하는 경우란 없다.

이에 비하면 우리 사회의 돈독에는 원칙과 규율이 모자란다. 대신 돈독과 위화감이라는 이중적 잣대 속에서 왔다 갔다 한다.

딱히 누구랄 것 없이 투자자.투자기관.기업인.정부 다 마찬가지다.

투자기관들은 그간 투자자들이 돈독 들게 하는 데 과감했다. 수익증권을 팔면서 일정 수익률을 보장한다는 각서를 써 주었을 정도면 그 이상 과감할 수가 없다. 펀드도 세일하듯 팔았다.

돈독 앞에서 투자자들이나 정부는 '투자는 자기 책임' 이라는 원칙을 번번이 깨곤 한다.

89년 12.12 증시대책이나 '투신을 부실 속으로 끌어들여 큰 화근을 만든 것이나, '지난해 '대우부실을 정리하며 환매사태를 막으려 '대우채가 편입된 수익증권 투자자들의 원본을 상당부분 보장해준 것이나 다 원칙을 크게 깬 것이다.

비록 당시의 상황이 매우 어려웠다지만, 요즘도 증시대책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대통령이 관계장관을 공개적으로 질책하는 상황에서는 원칙과 규율을 지키기가 어렵다.

돈독은 탓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돈독에도 격(格)이 있고 규율이 있어야 한다.

거품보다 무서운 것은 격이 없고 규율도 없는 사회의 돈독이다.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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