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김칫국부터 마신 현대자동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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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현대자동차는 지난 7일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사장이 직접 나서 이례적으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다임러크라이슬러.미쓰비시와의 월드카 공동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현대차가 주도적으로 전략적 제휴를 형성, 함께 개발한 소형차를 내후년부터 전 세계에 팔겠다는 내용이었다. 이계안 사장은 "이미 3사가 전격 합의했다" 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만 하루도 안돼 이 발표가 설익은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8일 아침 해외 주요 언론들은 다임러크라이슬러가 현대차의 발표 내용을 부인했다고 보도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로이터 등은 "현대차와 월드카 생산에 대해 논의한 적이 없으며 논의하고 있지도 않다" 는 다임러크라이슬러측 대변인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급락한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한 것' 이라는 표현도 썼다. 또 다른 파트너인 미쓰비시도 "소형 월드카 개발에 현대차를 참여시키는 방안을 검토한 것은 사실이나 아직 합의에 이르진 못했다" 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실제로 현대차와 다른 두 회사간에는 투자비용.판매지역 분배와 같은 핵심 부분에 대해서조차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세 회사의 실무팀이 한 테이블에 앉기도 전이었으며, 더구나 현대는 기자회견 계획조차 다른 두 회사에 알리지 않았다.

현대차 경영진은 8일 아침부터 바빠졌다. 현대차는 출장 중인 다임러크라이슬러 슈렘프 회장과의 전화 접촉을 시도했으나 다임러크라이슬러 측으로부터 뚜렷한 반응을 얻는데 실패했다.

현대차로선 이번 일로 국제 신인도 손상과 함께 망신살이 뻗쳤다. 기업간 전략적 제휴는 보안이 생명이다. 외국 기업들은 협상완료 전에는 철저히 비밀에 부치며, 협상 사실만 미리 알려져도 아예 그 자체를 없던 일로 한다.

그동안 이를 지키지 않아 대사를 그르친 사례가 적지 않다. 최근 한미은행이 도이체방크와의 5천억원대 주식예탁증서(DR) 매매협상 사실을 공시하자 도이체방크는 협상 자체를 철회했다.

또 지난 2월 대산유화단지 통합추진본부가 미쓰이측과의 협상 내용을 앞질러 흘리다 결국 협상이 무산됐다.

현대차가 7일 오전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급조한 것도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오너 회장이 지시하자 현대차는 주말인 6일 오후 허겁지겁 기자회견 일정을 언론사에 알렸다. 그러나 회견 직전까지도 발표 내용의 수위를 결정하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대차가 서두른 데는 주가를 떠받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작용한 것같다" 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현대차는 "이번 일은 최고경영층간에 극비리에 합의된 사항이며, 다임러크라이슬러와도 지난 1월부터 접촉했다" 며 "발표 시기가 주말이어서 혼선이 빚어진 것" 이라고 해명했다.

월드카 계획이 무산될지, 순조롭게 진행될지는 현재로선 예단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차는 이처럼 중대한 사안 처리에서조차 오너의 독단과 협상 태도의 미숙함을 드러냈다.

현대차는 누가 보아도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인데, 이번 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다른 기업까지 영향을 받을까 걱정이다.

서익재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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