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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야마 이쿠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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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평안도 일대에 산재한 고구려 고분벽화가 2004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 지정됐다. 폐쇄국가인 북한 땅에 있다는 이유로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하던 고구려 벽화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정부도 북한 정부도 아닌, 일본 화가 히라야마 이쿠오(平山郁夫)의 노력과 힘에 의해서였다.

히라야마와 고구려의 인연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연히 사진으로 본 수산리 고분벽화의 여인에 젊은 화가 히라야마의 눈이 꽂힌 것이다. ‘고대의 일본 여왕 히미코도 필시 이런 모습이리라’. 이 영감을 바탕으로 그는 이듬해 ‘히미코 광벽환상’이란 작품을 완성했다. 4년 뒤 히라야마가 또 한번 눈을 비벼야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의 옛 수도였던 나라 지역에서 발견된 다카마쓰 고분에서 그가 그린 히미코와 똑같은 모습을 한 미인도가 나온 것이다. 그는 “일본 문화의 원류는 한반도에 닿는다”는 신념을 간직하게 된다.

그로부터 25년 만인 97년 수산리 벽화를 직접 육안으로 볼 기회가 찾아왔다. 유네스코 친선대사로 있던 그의 북한 방문이 실현된 것이다. 그는 북한 관리들에게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제안하고, 이를 위해 정밀조사와 보존 대책이 시급하다고 설득했다. 아무런 장비도 경제적 여력도 없던 북한 정부는 모든 것을 히라야마에게 의존했다. 일본 정부에 호소해 지원금을 타냈지만, 부족한 돈은 자신의 전시회 수익금으로 충당했다. 그는 일본에서 그림 값이 가장 비싼 화가였다. 컴퓨터로 제어되는 항온·항습 장치를 들여보내다 대공산권수출통제(COCOM)에 걸리자 직접 “문화재 보존 이외에 다른 일에 전용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보증을 서고 반입한 적도 있었다. 방북 횟수 9차례와 유네스코에 대한 혼신의 설득, 그런 노력에 힘입어 고구려 벽화는 한민족의 보물에서 세계인의 보물로 거듭났다.

히라야마는 왜 그토록 고구려 벽화에 애정을 쏟았을까. “중3 때 내가 살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는데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인류가 서로 싸우는 일이 다시 있어선 안 된다는 신념으로 살아왔다. 일본은 고대에 한반도에 많은 신세를 졌던 민족이다. 문화예술을 통해 타자를 존중하고 돕는 일, 그것이 나의 평화운동이다.” 그가 일평생 작품으로 천착했던 불교의 구도자처럼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던 말이 아직 귓전에 선하다. 그는 지난주 79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