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정말 일을 내려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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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요즘 개혁.부실.증시 등 경제 문제를 다루는 솜씨들을 보면 행동은 거칠되 결심에는 소심하다. 될 일도 안되게 생겼다.

주가가 반토막이 나더라도 몇달에 걸쳐 가라앉으면 '다지기' 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주저앉으면 공황이다.

부실 정리도 솜씨있게 하면 합리적 퇴출 또는 갱생(更生)이지만, 우악스레 터뜨렸다가는 흑자 도산에 '불난 집 세일' 꼴 나기 십상이다.

개혁은 빅뱅 스타일로 해야 할 때가 있으나, 빅뱅은 제도로 하는 것이지 우격다짐이 아니다. 제도는 언젠가 새로운 질서를 낳지만 우격다짐은 질서를 망가뜨린다.

그런데도 요즘 돌아가는 것을 보면 또 한번 파국(破局)을 봐야만 직성이 풀릴 사람들 같다.

언론부터 경제를 거칠게 다룬다.

총선 직후 정부.재계는 세게 한 판 붙는 것처럼 비춰졌다. 재계가 "더 이상 지배구조에 간섭 말라" 며 나서고, 정부는 세무조사로 재벌을 몰아붙이는 것처럼.

그러나 전경련이 "간섭 말라" 고 한 적도, 정부가 "구조조정본부를 해체하라" 고 한 적도 없다. 전경련은 "구조조정본부에 과징금 물린다는 것은 잘못이다" 고, 정부는 "구조조정본부가 본래 역할을 다하면 당연히 해체다" 고 했을 뿐이다.

민감한 문제일수록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데 "그게 그 소리 아니냐" 고 자의적으로 거칠게 전하면 싸움을 붙이는 것밖에 안된다.

세무조사도 마찬가지다.

"실상 이번 총선에선 과거와 달리 재벌 두들기기가 도움이 안된다는 분위기였다. 총선이 끝나자 별로 시간이 없다는 판단에서 예정된 조사를 서두른 것이다. " 한 국무위원의 말인데, 이도 못믿는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정기 조사이므로 4대 그룹뿐 아니라 차례로 그 이하 그룹도 한다" 는 관계 장관의 설명을 '세무조사 확대' 로 전하는 것은 언론의 '감각' 이 아니다.

오죽하면 정부.재계가 되레 더 놀라 예정에 없던 점심까지 서둘러 먹었을까. 할 말도 별로 없이. 재벌 개혁을 다그치는 것과, 정부가 재벌에 본때를 보여주려 한다고 하는 것은 다르다. 정부.재계의 불신은 사실이나 맨날 내놓고 싸움만 하는 것도 아니다.

남북 경협을 무슨 돈으로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되자 청와대의 요청으로 전경련이 자금조달 방안을 발표하고, 북한의 사회간접자본 사업을 놓고도 청와대가 "여기서 여기까지는 당신네가 맡아 주었으면 한다" 고 운을 떼는 나라가 아닌가.

어쨌든 점심 한 번으로 진화될 정부.재계의 충돌로 시장은 한동안 불안했다. 그를 전후해 우리 증시는 몇번 '붕괴' 했고 '공황 상태' 까지 갔었으며, 우리 경제는 '과열 국면' 과 '안정 성장' 을 오갔다.

언론이 거칠어서 그런지 요즘 정부는 부쩍 소심해졌다. 될 일도 실기(失機)하게 생겼다.

한투.대투 부실 정리 방안을 발표한 다음날 투자자들이 현대 계열 주식을 던진 것을 정부는 되새겨 보아야 한다. 왜 시장이 실망했는지.

정부는 요즘 시장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윗분' 이나 언론.야당의 눈치를 더 보고 있다. 특히 공적자금 조성의 규모와 명분, 부실 책임 규명에서 그렇다.

한투.대투든 현대투신증권이든 부실 책임은 정부.기업.투자자가 다 나눠져야 하지만 그 중 으뜸은 정부다. 1989년 12.12 증시대책부터 따져내려오지 않으면 투신 부실은 설명이 안된다.

정부는 명분을 얻으려고 기업의 '뼈를 깎는 자구(自救)' 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더 좋은 명분은 정부의 '뼈를 깎는 반성' 이다. 그래야 기업의 자구 노력뿐 아니라 투자자의 손실 분담도 원칙으로 굳게 세우고 속전속결로 부실을 처리할 수 있다.

그러려면 전임자에 대한 예(禮)가 아닐 경우도 있겠지만, 부실 정리를 제대로 하려면 이른바 모피아(MOFIA)등 속세의 질긴 인연을 끊어야 한다.

현대에 대해서는 더 할 말도 없다.

후계구도 싸움 때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더니 어려운 국면에서의 결심은 미루고 있다. 이 거친 세상에서 언제까지 '원칙' 만 내세우고 있을텐가.

이미 일이 여기까지 왔는데.

투신 부실도, 현대의 어려움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다 알던 사실이다.

그런 일이 왜 막다른 골목에서의 초읽기처럼 돼 버렸는지, 정말 일들을 내려는가.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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