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정 합의했지만 시행까지 산 넘어 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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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노조와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에 대해 노사정 3자 협상이 타결된 4일 서울 여의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에서 임태희 노동부 장관(오른쪽부터), 장석춘 한국노총 위원장, 이수영 경총 회장이 합의문을 발표한 뒤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사정이 합의한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해법은 기업에 불리할 것이 없다. 경영계는 그동안 복수노조는 금지하고, 전임자 무임금은 내년 1월 1일부터 기업규모와 관계없이 전면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전임자 무임금 시행이 6개월 늦춰졌지만 사실상 경영계의 요구가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복수노조에 대해서는 겉으로는 금지를 요구했지만 속내는 달랐다. 두 문제 모두 글로벌 스탠더드다. 그런데 노조가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전임자 무임금만 시행할 수는 없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래서 최대한 복수노조 시행은 늦추고, 안 되면 두 문제 모두 유예하는 것도 고려했다.

하지만 예상치 않게 한국노총이 복수노조 유예를 들고 나왔다. 전임자 문제는 시행에 앞서 준비기간을 달라고 했다. 한국노총 내 최대 계파 중 하나이자 한나라당 강성천 의원이 위원장을 지낸 교통운수노조 쪽에서 이런 요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복수노조가 시행되면 기존 노조가 가진 거액의 조합비 등 기득권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요구였던 걸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경영계로서는 이런 요청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정부는 노사가 이 정도까지 의견 접근을 하자 뒷짐만 지고 있을 수 없었다. 적극적으로 노사 중재를 해서 합의안을 끌어냈다. 정부로선 노사정 합의의 모양새를 갖추면서 구체적인 시행 방안을 법에 담아 개정할 수 있게 됐다. 복수노조는 2년6개월 ‘시행유예’가 아니라 ‘준비기간’임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까지 구체적인 시행방안이 없어 논란이 일었는데 이를 확정해서 법에 명시하기 때문에 2012년 7월에는 무조건 시행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정은 녹록하지 않다. 내년 7월 전임자 무임금을 시행하기에 앞서 노사정이 공동으로 사업장 실태 조사를 하기로 했다. 그 결과에 따라 노조 간부에게 임금을 줄 수 있는 항목(타임오프 항목)을 추려 대통령령에 명시한다. 이 과정에서 노조는 타임오프 항목을 최대한 많이 명시하려 할 것이고, 경영계는 최소화를 주장할 전망이다. 또 한 차례의 노사정이 격돌이 불가피하다.

복수노조 허용 시기도 문제다. 시행 시점인 2년6개월 뒤는 대통령 선거가 열리는 2012년 7월이다. 각 정당들이 대통령 후보를 내고, 선거운동을 벌일 때다. 노동계는 이를 기회로 삼을 법하다. 정치권이 당리당략에 따라 이번처럼 노동계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다. 경영계는 노조를 설립할 수 있는 요건을 강화하는 쪽으로 법 개정을 요구하며 맞불을 놓을 전망이다. 논란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노사정 모두 글로벌 스탠더드를 저버렸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특히 정부는 노사정 합의 하루 전까지 “내년에 반드시 시행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번 합의로 이 원칙은 폐기됐다. 철도노조의 파업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지킨 원칙 고수 방침이 노동정책에서는 휴지조각이 된 것이다. 정부의 정책 신뢰도에 크게 금이 간 것은 물론이다.

민주노총은 반발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이날 성명을 내고 “정부가 그토록 강조한 국제기준에도 전혀 맞지 않는다”며 “법과 원칙을 말해 온 정부가 스스로 원칙을 뒤집었다”고 비판했다.

국회 처리 과정에서는 민주당이 변수다. 그러나 노사가 합의한 사안을 민주당이 섣불리 폐기하지는 못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민주당이 발목을 잡아 노사합의로 만든 개정안을 통과시키지 못하면 현행법대로 내년에 시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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