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국회도 보이저호처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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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자신이 정말 대서양을 횡단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린드버그는 저공비행으로 어선에 다가가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그러나 세계일주 무착륙 비행을 한 보이저호는 미국의 PC 네트워크와 아마추어 무선기사를 통해 제일 먼저 그 성공이 확인됐다.

정보사회의 위력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곧잘 비교돼온 삽화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실감 있게 설득하기 위해 "보이저호가 필리핀 상공에서 태풍을 만났을 때도 일본의 한 PC통신자를 통해 기상위성 히마와리의 정보가 미국으로 전해지고 그것이 베이스 캠프로 들어가 남쪽으로 돌라는 지시를 내리게 됐다" 는 사실도 빼놓지 않는다.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대서양 횡단과 세계일주의 기록차이는 단순한 비행기의 기계와 파일럿의 비행술이 아니라 정보의 차이에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위성통신과 장거리 항법장치 등 최신 정보기기가 없었다면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보사회의 특성이나 그 힘을 정보기술만으로 설명하려는 방식은 그 자체가 이미 산업주의의 낡은 유물에 속한다.

보이저호의 텍스트를 좀더 다양하고 심층적인 시각에서 읽어보면 정보사회의 다이내믹한 패러다임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선 린드버그의 무착륙 대서양 횡단은 신구대륙을 잇는 서구문명의 한정된 공간에서 이뤄진 것이지만 보이저의 무착륙 세계일주는 문자그대로 글로벌 공간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보이저 읽기의 첫번째 해독은 바로 공간 패러다임의 변화이며 정보사회란 바로 서구중심의 대서양을 지구공간으로 이동시키는 힘을 의미한다.

둘째로 린드버그는 남성 단독 비행기록이었지만 보이저호의 그것은 D 루턴의 남성과 J 예거의 여성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린드버그의 비행이 남성과 개인의 힘을 과시한 영웅을 낳았다면 보이저는 남녀 팀워크로 이룩한 화합의 '짝' 을 탄생시킨 것이다.

정보미디어는 음양원리처럼 반드시 발신자와 수신자의 쌍방향에서 실현된다.

공중전화통만한 공간 속에서 두사람이 한몸처럼 협력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2백16시간을 무급유.무착륙으로 날 수는 없다.

정보화 사회는 개인이나 집단으로는 불가능한 너와 나 '사이' 의 짝에서 생겨나는 힘을 밑받침으로 하고 있다.

셋째로는 다운사이징이다. 보이저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것은 경량화.슬림화였다.

중량을 덜기 위해 여비행사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자른다.

그것으로 4백m를 더 날 수 있고 그것이 생사의 갈림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정보기술은 기업을 비롯해 모든 기구를 보이저호처럼 군더더기를 깎아내고 최소치로 경량화하는 일을 요구하고 또 그것을 가능케 해준다.

넷째는 민간파워다.

보이저호에서 내려오자마자 "우리는 대기업이나 국가의 보조 없이 시민의 열의와 협력으로 이 일을 성취했다.

이 일은 나와 예거의 일만은 아니다.

이러한 일을 가능케 한 민주주의사회에 대해 새삼스럽게 감사를 드린다" 고 루턴은 말했다.

이때의 민주주의를 정보사회로 바꿔놓아도 무방할 것이다.

실제로 기록비행은 개인의 계획으로 시작됐지만 2백만달러에 달하는 제작비 거의가 시민의 기부금으로 충당됐으며, 기체 제작과 비행의 지원에도 많은 자원봉사자가 참여했다.

보이저호는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사회의 힘이 개인을 국가와 맞먹게 하고 대기업도 하지 못하는 것을 시민단체와 자원봉사자가 이뤄낼 수 있다는 민간파워를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보이저 읽기의 정보코드는 꿈과 헌신이다.

보이저를 설계한 B 루턴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라는 말에 "먼저 꿈을 가져라.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하는 착실한 방법론과 스텝을 가져라. 그리고 최후로 중요한 것은 헌신이다" 라고 말했다.

이제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다.

새로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영웅 린드버그가 아니라 보이저호에 탄 한쌍의 승무원들이다.

그동안 선거로 실종됐던 새 천년의 꿈을 다시 실현하기 위해 더도 덜도 말고 국회를 보이저처럼 만들어 보라는 부탁이다.

<새천년준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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