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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인 쩐례꿍씨가 본 '최승희 무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그동안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북한의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1960년대 초 행적이 북한에 유학했던 한 베트남 무용가의 증언을 통해 확인됐다.

베트남 국비유학생으로 61년 12월~64년 12월 3년간 북한에 체류했던 무용가 쩐례꿍(64.베트남 무용동맹회원). 쩐은 최승희에게 직접 무용을 배웠으며 북한측에서 찍어준 최승희의 공연 사진들을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최승희는 58년 남편 안막이 숙청되면서 일선에서 물러난 후 67년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쩐의 증언과 사진으로 60년대 초반까지 활발한 활동을 했음이 입증됐다.

쩐은 "55년에 북한과 베트남간 예술 교류가 시작됐으며 58년에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졸업생인 주혜덕(3회), 김재흥(4회)이 고문 교사 자격으로 1년간 베트남 무용학교에 와서 가르치기도 했다" 며 "61년에 나를 포함해 안무.연출 6명, 조명.무대감독 4명 등 10명의 베트남인들이 북한으로 유학갔다" 고 말했다.

당시 쩐은 베트남 무용학교의 민속춤 교사였기 때문에 학생 자격이었던 다른 유학생들과는 달리 민족예술극장 안무가였던 최승희에게서 직접 무용교수법을 배울 수 있었다.

최승희는 '어떻게 하면 예술로써 민족의 특수성을 살릴 수 있는가' 를 주제로 가르쳤으며, 각각의 춤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수업을 주로 진행했다.

가장 인상깊은 일은 최승희가 학생들에게 가야금을 연주하게 하고 즉석에서 고안한 춤을 춘 것. 처음에는 가야금 연주를 그냥 듣기만 하고, 두번째에는 연주를 들으면서 무용 동작을 그림으로 그리더니 세번째 연주에는 일어나서 춤을 췄다.

순수한 시골 처녀의 아름다움을 그려낸 이 춤은 당시 50이 넘는 나이라는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는 "즉흥적으로 그렇게 훌륭한 춤을 만들어 내는 데서 감동을 받았다" 며 "최승희의 춤은 그 동작이 그리는 대상의 심리를 표현하는데 강했으며 동작 하나하나가 보는 사람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의미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고 회상했다.

쩐은 최승희의 독무 '춤추는 고구려 처녀' '장구춤' , 무용극 '계월향' '대동강의 일요일' 등 수많은 작품을 보았는데, 그 중에서도 장구춤은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고 전했다.

또 그의 춤은 이전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적인 정서가 아니라 민족적인 색채를 담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쩐은 "당시 무용극장 안무가였던 최승희의 딸 안성희에게서도 무용을 배웠다" 고 말했다.

안성희는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아 최승희와 마찬가지로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으며, 최승희와 안성희가 지나가면 아무리 나이 많은 사람이라도 일어서서 인사를 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9년 동안 공부한 안성희가 외국의 무용, 새로운 무용을 도입한 반면, 최승희는 민족적인 것을 지키려고 해 모녀간에 대립이 심했다고 쩐은 전했다.

또 한 가지 관심을 끄는 사실은 최승희의 남편 안막의 상황. 지금까지 58년에 숙청돼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쩐은 자신이 북한에 체류할 당시 안막을 직접 보았다고 증언했다.

61~62년에 길가던 사람들이 '저 분이 최승희의 남편' 이라고 말해 두어차례 본 적이 있다는 것. 최승희보다 많이 늙어 보이긴 했지만 평범한 외모에 자유롭게 활동하는 듯이 보였다고 한다. 당시 최승희는 쩐에게 남편이 문화성 부부장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89년 국제무용가협회 세미나 참석차 다시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으나, 최승희에 대해 북한인들은 "이미 돌아가셨다" 라고만 할 뿐 더 이상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쩐은 최승희에 대해 "북한에 가기 전부터 최승희의 명성과 재능에 대한 찬사를 수없이 접했지만 직접 보니 명성보다 더욱 뛰어남을 느낄 수 있었다" 면서 "너무나 아름답고 생각이 깊은 분이었다.

평소에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으나, 무용이야기를 할때는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고 회상했다. 쩐은 "지금도 최승희에게 무용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을 깊이 감사한다. 무엇보다 무용의 민족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가르침이었다" 고 말했다. 쩐은 무용이론 저술활동을 하는 한편 베트남의 무용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하노이〓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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