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만의 신작 '그림일기' 내놓은 고영남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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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좀 거칠게 말해 요즘 한국영화계는 '젊은이들 판' 이다.

제작자.감독.배우 등 현장 인력에서부터 극장의 관객에 이르기까지, 1980년대 말부터 진행된 세대 교체의 거센 물살은 중견과 원로들이 설 자리를 크게 좁혀 버렸다.

감독만 해도, 한 해 제작되는 60여편 중 태반이 데뷔한 지 5년도 안 된 신예의 손을 거치는 게 최근 추세다.

60년대 프랑스의 '누벨 바그' 나 70년대 독일의 '뉴 저먼 시네마' 처럼 영화사(史)의 새로운 기풍은 늘 '살부(殺父)의 정신' , 아버지(선배)를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한국 영화계가 지금 그 정도로 혁신하고 있는 지는 따로 따져 봐야겠지만, 임권택을 제외하면 '현역' 으로 부를 만한 원로 감독이 거의 없다.

유현목.신상옥.김수용이 잊을 만 하면 띄엄띄엄 작품을 내놓고 있는 정도다.

평판이나 지명도에서 이들보다 밀리지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고영남(63)감독. 64년 데뷔 이후 자신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많은 영화를 만든, 이를테면 '영화의 기술자' 다.

그가 '내 아내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이후 10년만에 신작을 내놓았다.

'그림일기' 는 개그맨 이휘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친자확인 소송을 둘러싼 해프닝을 그린 코미디다.

영상자료원 통계에 따르면 '그림일기' 는 고감독의 백여덟째 작품이다.

이쯤되면 '한국의 로저 코먼(미국에서 B급 영화의 대부로 통하는 감독)' 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코먼 만큼의 대접도 못 받고 '힘' 도 갖고 있지 않다.

솔직히 이번 영화는 감독인 나 조차도 권하기가 민망할 만큼 실패작이다.

변명 같지만 제작자와의 미묘한 마찰로 마음먹은 대로 찍질 못했다. 적어도 30회는 촬영해야 하는데 22회밖에 못 찍는 등 아쉬움이 많다. 힘들게 잡은 기회라 잘하고 싶었는데. "

고감독은 시사회에 초대받지도 못했을 정도로 제작자와 사이가 틀어졌다.

감독은 두 부류가 있다. 제작자의 손을 들어주는 감독과 제작자가 마음껏 밀어주는 감독. 성격상 나는 전자에 속한다. 제작자의 요구를 냉정하게 내치기보다 가능하면 수용하고 타협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30여년을 지내놓고 보니 모질게 밀고나가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역시 감독은 자기 세계가 분명하고 오기가 있어야 될 것 같다.

그래서 임권택 감독이 너무 부럽다. "좋은 제작자를 만나는 건 감독에게 대단한 복이다.

영화에 애정과 이해가 있는 제작자는 그리 흔치 않다." 그는 원래 연극 연출가 지망생이었다.

50년대말 이해랑씨의 극단 '신협' 에서 수업하던 중 '밥은 먹을 수 있다' 는 말에 끌려 충무로에 발을 들였다.

'육체의 길' (59년)에 출연한 김지미의 수발을 들어주는 것으로 영화 일을 시작한 그는 '성실성' 을 인정받아 조감독만 5, 6년을 했다.

그러다 곽정환(현재 서울극장 대표)씨가 처음 투자하는 영화의 메가폰을 잡았다.

일본 시나리오를 베껴 만든 '잃어버린 태양' 이라는 청춘물이었다.

'이 맛에 감독하는구나' 싶을 만큼 대성공이었다. 곽씨와 두번째 만든 '명동 44번지' 도 히트하면서 '흥행 감독' 으로 자리를 굳혔다. 일감이 밀려 1년에 열세 편까지 만든 적도 있었다.

그 속에는 '정부 지원금이 나온다는 제작자의 부탁으로 만든 반공영화' 같은 '잊고 싶은 영화' 도 있다. 그러나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받은 황순원 원작의 '소나기' (78년)나 공전의 흥행을 기록한 '빙점81' 은 스스로 대표작으로 꼽는다.

그는 지금도 '영화수업' 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일본잡지 '키네마준보' 에 실린 비평이나 시나리오를 한글로 옮기고 NHK에서 방영하는 좋은 영화를 녹화한 뒤 반복해서 본다.

"요즘 감각, 감각 하는데 늙었다고 모두 감각이 녹스는 건 아니지요." 이유야 어떻든 '그림일기' 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했다. 그에게 백아홉째 영화를 만들 기회가 주어져서 '뜻을 펼 수 있다면' 한국영화계를 위해서도 좋으려만.

글〓이영기.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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