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커스] '1994년-아무일도 없었던 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총선은 끝났다. 이미 우리의 관심은 남북정상회담으로 물길을 꺾었다. 6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의 보좌관이었던 나의 눈에 비친 사건과 국면, 그리고 구조로 얽힌 역사의 기록은 이러했다.

1994년 6월 15일 주가는 연 나흘째 하락세를 보였다. 민방공훈련은 그 어느 때보다 강도 높게 실시됐다. 북핵 위기로 전쟁이 날 것같이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야당(지금의 집권여당)은 정권안보차원에서 북핵 위기를 다룬다며 연일 목청을 돋웠다.

경제원조 금지를 골자로 하는 유엔 대북제재안 초안이 우리측에 전달됐다.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서울에서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북한으로 들어갔다. CNN의 취재팀이 동행했다.

16일 주가는 계속 하락세를 유지했다. 윌리엄 페리 미 국방장관과 게리 럭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에 1만명의 추가병력 투입 등을 포함한 대북 군사제재방안을 구체화했다.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같았다. 그러나 평양에 도착한 카터에게 김일성은 잠정적으로 핵프로그램을 중단하되 미국이 경수로 공급을 약속하면 항구적인 동결도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카터는 갈루치에게 사태의 반전을 알렸다.

18일 서울로 돌아온 카터는 오찬을 함께 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조건 없이 이른 시일내에 만나고 싶다" 는 김일성의 구두 메시지를 전했다. 金대통령은 이를 즉각 수락했다. 19일 미키 전 일본총리의 미망인이 손녀와 함께 金일성이 초청한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는 말을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미키 미망인은 이 엄청난 사실을 베이징공항에서 일본 언론에 알렸다.

20일 사태가 급변하고 있음을 감지한 정부는 서둘러 이영덕 총리 명의의 전화통지문을 북측 총리 강성산에게 보내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부총리급 예비접촉을 28일 오전 10시에 판문점에서 갖자고 제의했다.

22일 북측에서 정상회담 예비접촉에 조건 없이 응낙한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23일 북.미간 3단계회담을 7월 8일에 열기로 합의했다.

북한 외교부 부부장 강석주가 갈루치에게 북.미 회담기간 중 재처리중단, 핵연료 재충전 중지 및 국제원자력기구(IAEA)사찰단 체류연장 등 북핵 프로그램의 중지를 공식통보했다.

이날 오전 8시부터 20분간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은 전화로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3단계 회담 등 맞물린 한반도 현안을 직접 정리했다. 28일 예비실무접촉에서 남북정상회담을 7월 25~27일 평양에서 갖기로 합의하고, 2차 정상회담은 양 정상의 회동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우리가 평양을 방문하고 북측이 서울방문을 확약하지 않아 상호주의 관철이 안된 점에 대해 청와대는 부담스러워했다. 김일성은 서울에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반면 김영삼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에 엄청난 관심과 정력을 기울였다.

대통령 일정도 남북정상회담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집중됐다. 모든 국가적 역량이 남북정상회담에 모아졌다.

하지만 7월 25일로 예정된 정상회담까지의 준비기간은 너무 짧았다. 의제.의전.경호 등 난제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북측은 여전히 군사.정치.경제적 핵심의제를 미국과 직거래하려 했다. 평양으로 가는 것이 의전상 '알현' 의 모양새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국민의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최고위집단이 평양에서 일거에 볼모로 잡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경호상 완전히 접어놓을 수도 없었다.

7월 8일 김일성 사망소식이 전해졌다. 그 순간 남북한 최초의 정상회담 꿈은 사라져 버렸다. 목표를 상실한 김영삼정권은 이때부터 표류하기 시작했다.

정권을 지탱하던 긴장감이 일순간에 풀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94년 결국 그 해는 역사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해로 기록됐다.

몰락하는 명(明)대를 한 편의 드라마처럼 엮어낸 레이 황의 저서 '1587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2000년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그것은 여전히 우리 앞에 숙제로 남아 있다.

정진홍<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커뮤니케이션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