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서 본 한국] 쓰레기장 대신 화장실 가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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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서울에서 산 지 꽤 여러 해 된다. 그런데 외국인으로서 꼭 짚어야 할 게 있어 한마디 해야겠다.

바로 화장실이다. 솔직히 80년대에 비해 사정이 많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한국의 화장실은 C학점 이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특히 여자 화장실이 그렇다.

얼마 전 한국음식을 먹기 위해 딸과 함께 한식당을 찾은 적이 있다. 딸이 화장실에 갔는데 공교롭게도 그 화장실은 주방을 마주보며 창문이 뚫려 있었다.

그 창문을 통해 건장한 주방장들이 내 딸을 쳐다보면서 씨익 웃더라는 것이다. 내 딸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다방 따위에 딸려 있는 화장실도 엉망이다. 어쩌다 다방에서 화장실을 찾으면 '다방 아가씨' 는 열쇠를 주면서 2층 계단에 붙은 화장실로 가라고 한다.

간신히 문을 따고 들어가보면 안이 왜 그렇게 어둡고 깜깜한지. 천장에는 크리스마스 트리용 같은 작은 전구 하나만 달랑 매달려 있고 손 씻을 물도 나오지 않는다. 또 어떤 다방은 한 화장실을 남녀가 공동으로 쓰게 돼 있는 경우도 있어 난감할 때가 많다. 화장지가 아예 없는 경우도 다반사다.

특히 나를 화나게 만드는 건 같은 화장실인데도 여자화장실은 사정이 더욱 나쁘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한국 여자화장실의 가장 큰 특징은 화장실이 쓰레기장 기능을 겸하고 있다는 것이다.

화장실 안에 마대자루와 걸레, 쓰레받기가 놓여 있는 것은 예사고 부서진 가구나 쓰레기통,빨랫감, 칫솔 등이 마구 흩어져 있다.

이 즈음 반가운 뉴스를 들었다. 수원시가 현대적이고 깨끗한 화장실 만들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과 나 같은 외국인들의 불편함을 용케 알고 이런 운동을 벌이나 싶어 정말 기뻤다.

다른 시청에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수원만큼만 해라" 고.

이라빈 <아태평화재단 연구출판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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