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진혁 칼럼

집권세력에 직언이 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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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권력자에 대한 직언은 지금이 민주화시대라고 해도 어떤 면에서는 왕조 때보다 더 하기 어려운지 모른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흔히 직간을 했다고 하는데 요즘엔 누가 직간을 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일이 없다.

1611년 선비 임숙영(任叔英)은 과거 최종 시험에서 광해군이 붕당 문제와 공납제도 개선 등을 물었지만 "진짜 큰 우환과 병폐에 대해서는 왜 문제를 내지 않으십니까"라며 왕후와 후궁의 인사개입.뇌물 등 임금의 실정(失政)을 통렬히 비판하고 언로(言路) 개방과 임금의 자기 수양 등을 강조한다. 시험관들은 이 글을 장원으로 뽑았으나 대로한 광해군은 급제 취소를 명한다. 그러자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 등 많은 신하가 들고 일어나 임금은 결국 4개월 후 임숙영을 급제시킨다.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토론 없는 국가대사 추진

이런 옛날 얘기를 생각하며 요즘 보안법 폐지를 밀어붙이는 정부.여당을 보면 400년 전 광해군 때보다 집권세력 내부의 언로는 더 막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보안법 문제에 관해서는 정부.여당 내에도 여러 갈래 의견이 있었다. 국무총리.법무부 장관 등이 폐지 아닌 개정론.신중론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하루저녁 대통령이 TV에 나가 폐지를 주장하자 그것으로 그뿐이었다. 그것이 곧 결론이었다. 토론다운 토론도 없었다. 조선 선비가 아니더라도 웬만큼 민주적인 집단이라면 "대통령님, 그게 아닙니다" "이런저런 측면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라는 등의 이견과 직언은 최소한 나왔어야 마땅했다. 그래서 그런 여러 의견을 놓고 여권 내부에서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반영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정상이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하루아침에 국론이 두 쪽으로 갈리고 1500명의 각계 원로가 나서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런 직언이나 이견 표출이 없었던 것은 지금 사람들이 조선시대 공직자보다 못한 탓일까. 아니면 조선 왕조가 지금보다 더 민주적이어서 그럴까.

노무현 정부는 스스로 토론을 좋아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보안법 폐지나 과거사 규명, 수도 이전 등 오늘날 국가를 혼란에 몰아넣고 국론을 분열시키는 국가 대사들은 모두 충분한 토론 없이 결정.추진되고 있다. 그런데도 토론을 좋아한다는 집권세력 내부에서는 변변한 이견 하나 나오는 것을 보기 어렵다. 여당의 150명 국회의원, 수십명의 장.차관, 참모들…. 이들이 다 예외없이 지금 이 시기의 수도 이전과 과거사 규명을 찬성하고 보안법 폐지를 지지하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밖에서 보기에 자기 소신과 다른 정책을 밀고 가는 사람도 있는 것 같고, 사석에서는 정부 내 분위기를 걱정.비판하는 고위 공직자들이 있다는 말도 들린다. 그런데도 실제 문제를 제기하거나 방침을 바꿔보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소신과 다르다고 사표를 내는 사람도 없다. 국민 50~80%가 반대하는 국가 대사를 놓고 정부.여당은 100% 찬성을 유지한다니 과연 이게 정상인가.

군 출신 집권 시절에도 직언은 있었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한 군 출신 정치인은 정상외교에서 막 돌아와 우쭐대는 대통령에게 "각하, 요즘 너무 들떠 계십니다"라고 바로 면전에서 쏘아붙였다고 한다. YS 때도 한 참모가 바로 대놓고 "현철씨 구속이 불가피합니다"라고 말해 주변이 숨을 죽였다는 얘기도 있다. 노 정부에 지금 그런 사람, 그런 직언이 있는가. 집권세력이 소신도 없고 직언도 못하는 사람뿐이라면 국가의 앞날이 어둡다. 신생 권력집단이 벌써 이런 내부 경직성과 맹종(盲從) 경향을 보이는 것은 큰 문제다.

'잘못 방관죄'도 공직자의 큰 죄

얼마 전에 만난 한 전직 장관은 "수천억원을 받은 부패한 사람 밑에서 그것도 모르고 장관을 했다는 게 부끄러웠다"고 털어놓았다. 지금 공직자들도 나중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할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 좋은 정부에 몸담으면 마음껏 일하고 역사에 이름을 빛낼 수도 있지만 나쁜 정부에 몸담으면 마음고생만 겪다가 자식 보기도 민망한 경우가 생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정권에 책임감을 느껴야 할 고위 공직자는 자기를 위해서도 나쁜 정부가 되지 않도록 할 말을 해야 한다. 역사를 보면 '잘못 방관죄 ''침묵죄'도 공직자의 큰 죄가 된다.

송진혁 논설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