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근 의장은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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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오호근'(吳浩根)' 의장은 이헌재'(李憲宰)' 재경부장관 등과 함께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배출된 대표적인 스타 가운데 한사람이다. 작지만 단단한 체구에 빠른 판단과 추진력으로 불가능해 보이던 일들을 척척 처리해내 '해결사' 로 통한다.

부도 직전에 몰린 90여개의 국내 간판급 회사들이 마지막 처방으로 택했던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의 사령탑으로 발군의 솜씨를 발휘했다. 고집불통이던 대우 해외채권단과의 대우 해외부채 협상도 풀어냈다.

그러고는 외환위기의 상징인 대우그룹 구조조정의 마무리 역할을 맡았다. 吳의장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교수로 시작해 한국종합금융 부장과 사장을 거쳐 기업구조조정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의 삶도 굴곡이 많았다. 1963년 대선에까지 출마했던 거물 야당정치인인 오위영씨의 장남인 그는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자 단돈 2백달러를 들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야 했다. 유학생활은 당시 가난한 한국의 젊은이들 대부분이 그랬듯 주경야독(晝耕夜讀)을 거듭해야 했다.

한양대에서 강의를 하던 그는 1976년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국종합금융 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사장직을 마지막으로 물러날 때까지 15년 동안 외자유치에서 국제차관 업무까지 말 그대로 '종합금융' 을 마스터했다.

91년에는 현 김대중 대통령의 평민당을 찾아 국회의원에 출사표를 던지기도 했으나 온 몸이 마비될 정도의 심한 편두통으로 정치의 꿈을 접어야 했다. 1년 뒤엔 의사로부터 "소세포 암이라 2~3개월밖에 안 남았으니 생을 정리하라" 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암세포는 기적적으로 어느 날 사라져 버렸다.

그때부터 그는 "인생을 두번 산다" 고 말한다. 덤으로 사는 인생, 거칠 것이 없다는 것이 그의 얘기다.

이헌재 장관과는 吳의장이 한국종금 사장 시절, 李장관이 한국신용평가를 설립할 때 출자에 참여하면서 연(緣)이 닿았다. 알려진 것처럼 절친한 교분보다는 "프로끼리는 통하는 사이" 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의 기업관은 단순명료하다. '완전경쟁' 과 '시장원리' 를 지키라는 것이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 운운할 필요도 없다. 이윤은 추구하되 법만 지키면 사회적 책임을 다 하는 것이다. 재벌은 자기 왕국을 건설해 제왕으로 군림하는 데 그 문제가 있다. 주주는 오너가 아니며 경영전권을 쥐어서는 더더욱 안된다. "

그의 철학과 인생목표는 그의 기업관보다 더 간단하다. 원칙대로 살 뿐 눈치는 보지 않는다. 대신 "애국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힘들다는 이유로 마다하지 않겠다" 고 말한다.

8개월 뒤 대우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난 뒤에는 국제금융업에 뛰어들어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 그의 희망사항이다.

이정재 기자

[오호근 의장 약력]

▶대구(58)

▶경기고.미국 페이스대학원 졸(경제학 석사)

▶72년 한양대 상경대 조교수

▶76년 한국종합금융 부장

▶86년 한국종합금융 사장

▶98년 기업구조조정위원회 위원장

▶2000년 대우계열 구조조정추진협의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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