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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민 만세”… 홍수환의 4전5기 챔피언 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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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1977년 11월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전에서 네 차례나 다운당하고서도 파나마의 카라스키야 선수를 질풍같이 밀어붙여 KO승을 거두는 홍수환.

1977년 11월 27일 파나마에서 홍수환 선수가 신설 체급인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에 올랐다. 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첫 번째 챔피언에 올랐을 때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리고 “그래 내 아들아, 대한국민 만세다”라는 대화로 새로운 유행을 창조했던 홍수환이 파나마에서 또 드라마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2회에 네 차례나 다운됐던 홍수환은 3회가 시작되자마자 역전 KO승을 이끌어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수많은 스포츠 사건이 있었음에도 77년 홍수환의 승리가 머릿속에 뚜렷하게 각인돼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역전’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자마자 나라를 잃었고, 식민지에서 해방되자마자 분단과 전쟁을 겪었던 우리 민족에게 ‘역전’보다도 더 뚜렷한 목표는 없었다. 1936년 손기정, 76년 양정모의 올림픽 금메달이 있었지만, 70년대 레슬링의 김일, 권투의 홍수환, 그리고 야구의 군산상고에 환호했던 것은 바로 역전의 드라마 때문이었다. 이들은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대신해 역전 드라마를 써 주었던 것이다. 홍수환의 드라마는 77년 수출 1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그리고 쌀 자급을 통한 쌀 막걸리의 재등장과 점철되었다.

또 다른 이유는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피어난 환희의 순간이었다는 점이다. 77년은 유신의 어두움이 사회를 짓누르고 있었던 시기였다. 75년 베트남 패망뿐만 아니라 74년의 오일쇼크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으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홍수환의 승리 한 달여 전부터 본격화된 학생시위로 인해 긴급조치 9호 이후 처음으로 20여 일간의 휴교가 있었지만, 언제쯤 봄이 올 것인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여기에 더하여 동년 11월 11일에 있었던 이리역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건은 사회를 더 음울하게 했다. 이러한 어둠 속에서 터진 홍수환의 승리는 잠시나마 전 국민의 마음을 환하게 해 주었다.

스포츠는 이렇게 사회적으로 다양한 효과를 만들어 내며, 특히 국가대항전을 통해 국민을 통합하는 수단으로 작동했다. 대부분의 독재자가 스포츠 육성을 강조했던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스포츠는 갈수록 순수성과 다양성을 잃고 상업화되고 있으며, 이제는 잔인함까지 더해가고 있다. 비록 그것이 ‘국가’를 위해 이용됐다고 하더라도 ‘그때 지금’의 아름다운 스포츠 정신이 그리워진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