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쩡교수에 보내는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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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먼저 쩡(鄭)교수의 오랜 숙원이 이번 민진당의 승리로 달성된 데 대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88년이던가요? 중앙연구원의 린(林)교수댁에서 鄭교수를 만나뵙고 대만의 민주화와 대만화에 대한 열정에 감복했던 일이 불과 10여년 전인데 이제 그때 열정적으로 말하던 소원이 달성됐군요. 그때 나는 鄭교수를 같은 중국사 연구자로서가 아니라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행동적 지식인의 한 전형으로서 소개받았었지요.

대만사람이 민주화의 거창한 일을 해냈습니다만 선거결과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예측은 빗나갔었습니다.

일찍이 대만의 '문성(文星)' 잡지 중심의 자유주의운동과 '미려도(美麗島)' 잡지 중심의 신세대 민주화운동을 한국내에 소개했고, 대만 민주화운동에 상당한 정도로 동정하고 있다고 자부한 나였지만 민진당의 집권은 아직 시기상조로 보았던 것이지요.

민진당의 승리가 가져올 거대한 변화의 파장을 과연 대만사람들이 감당하려할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심정적으로는 민진당 후보를 지지하더라도 기표소안에서의 결정은 변화를 두려워할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나의 예측이 빗나갔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앞으로 민진당의 승리가 가져올 변화가 엄청날 것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이겠지요.

국민당이라는 권력구조는 거대한 기득권 위에 구축된 것임은 학계에서 기득권세력과 맞서온 鄭교수가 누구보다 더 잘 아실 것입니다.

깊고 넓게 뻗은 기득권의 뿌리는 정치.경제뿐만 아니라 문화.학술분야에까지 외국인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범위하게 뻗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만 치안의 골칫거리인 막강한 조직폭력조차 기득권의 거대한 관계망 위에 안주하고 있다고 비난하기까지 합니다.

이제 민진당은 이 뿌리깊은 기득권의 관계망을 걷어치우는 힘들고 어려운 과업에 당면하게 됐습니다.

기득권세력의 방해.비협조는 당연히 예상되는 것이겠지요. 민진당이 승리했다고는 하나, 이는 민진당의 선전 때문이라기보다 기득권층의 분열 때문에 민진당이 어부지리를 얻었다는 견해도 있듯이, 분열했던 기득권세력이 다시 연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국민당정부의 부총통인 롄잔(連戰) 후보, 과거 국민당조직의 핵심간부였던 쑹추위(宋楚瑜) 후보 모두 다 기득권의 자양으로 성장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들과는 달리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 후보는 기득권층의 은고(恩顧)가 아니라 기득권세력과 싸움을 통해 정치적으로 성장한 사람입니다.

천수이볜총통당선자는 '미려도' 잡지그룹의 민주화인사를 법정변호하다 마침내 민주화대열에 참여하게 된, 기득권의 관계망 대신 자기자신의 신념과 능력으로 성장했다는 의미에서 신세대 정치인입니다.

천수이볜은 롄잔이나 쑹추위와 생물학적 연령에서는 별차 없지만 위에서 말한 것같은 배경 때문에 신세대로 불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그들 민주화운동의 신세대는 지역주의적 족벌의식에 안주하던 과거의 야당정객과도 확연히 구별되는 세대입니다.

투철한 민주화의식을 가지고 지역감정이나 대만의식을 성숙시킨 신세대 민주화운동가들은 동시에 인권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대만 민주화운동의 분기점이 된 '미려도' 그룹의 대량체포의 발단이 됐던 가오슝(高雄)의 민주화시위(1979년 12월 10일)는 바로 세계인권일을 기념하는 행사이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당시 '미려도' 잡지를 구해보고 있었습니다만, '미려도' 잡지가 "한국 경제기적의 신화를 벗긴다" 는 글을 통해 대만의 경제신화에 기생한 독재권력을 비판했을 때 주타이베이 한국대사관측의 항의를 받았지요. 이에 항의하는 사론(社論)을 실었다가 본문을 전면 새까맣게 먹칠한 채 발행한 것을 보고 착잡한 심정을 어찌할 수 없었던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득권의 관계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중에는 이번에 국가공무원이면서도 천수이볜 후보 지지를 과감하게 선언해 그의 승리에 적지않게 공헌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중앙연구원장인 리위안저(李遠哲)박사도 포함된다고 보아도 좋겠지요. 그는 기득권관계망의 보호없이 노벨화학상이라는 개인의 능력과 대만 학계에의 공헌의지를 갖고 고향에 돌아왔던 것입니다.

이제 이들 신세대가 대만의 모든 분야에 둥지를 튼 기득권을 청소하려들 것입니다. 기득권 관계망이야말로 반민주적 부패의 온상이기 때문이지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대교체.시대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저항은 끈질기고 강할 것입니다. 또한 민진당 지지의식의 핵심인 대만의식은 정권을 잡을 때 공헌한 만큼의 '신통력' 을 앞으로는 갖기 어려울 것입니다.

대만의식은 민주화를 위한 수단일 뿐이고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의 통일이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한 수단인 점도 흡사하다 하겠지요. 그러므로 대만의식에만 기대 완강한 저항이 예상되는 변화와 개혁을 수행할 수는 없습니다.

보다 원숙한 조절능력을 통한 민주화의 진전을 통해 그것은 추진돼야 할 것이고 이 점에서 천수이볜 당선자의 급격하지 않은 개인적 친화력, 절제된 조정능력에 기대하는 바가 특히 크다고 하겠습니다.

주변 관련국들도 그같은 방향에 맞춰 적극 지원해 여러가지면에서 동아시아역사의 위대한 실험이 될 대만의 변화를 지지해줘야 할 것입니다. 한국과의 부자유스런 관계를 개선함에 있어서도 민진당의 장점인, 허구의 명분을 과감하게 벗어던질 수 있는 실사구시 능력을 발휘하기 바랍니다.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도 5월에 있게 될 총통 취임식에 국제 관례상 가능하다면, 학계나 문화계 인사를 경축특사로 파견해 대만 변화의 성숙한 정착을 조금이나마 도와줘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하실 일이 더욱 많아질 鄭교수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민두기 <중국사.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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