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때 적금 찾아주오"…우체국·외무부 "우린 모르는 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일제시대 때 할아버지가 부은 우편적금을 찾게 해주세요. "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수탈에 여념이 없던 1930년대 후반 여름 한 농부가 자식의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부었던 우체국 적금통장이 최근 손자에 의해 발견돼 화제다.

그러나 손자가 뒤늦게 일본 총영사관.외무부.정보통신부 등 담당기관들을 찾아가 적금 해약을 하고 원금을 찾으려 했지만 '서로 나몰라라' 하는 바람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실정이다.

화제의 주인공은 현재 부산에 사는 손석엽(孫錫燁.33.회사원)씨. 그는 최근 할머니(88)가 넘겨준 가족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일본제국의 우체국 적금통장과 증서를 발견했다.

통장이나 증서에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 황간우체국 발행' 이라는 직인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당시 25세 청년이었던 할아버지는 쇼와(昭和)12년(1937년) 2월 23일부터 15년 4월 6일까지 매월 10전(당시 쌀 한말 값이 2전)씩 3년2개월간 6원24전의 적금을 부었다는 기록도 그대로 담겨 있다.

孫씨는 할머니에게 적금통장에 대한 사연을 물어봤고, 그제야 당시 할아버지가 자식교육을 위해 땔감을 팔아 적금을 붓다가 40년 5월 징병에 끌려가면서 중지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할아버지는 징병에서 돌아온 뒤 황간우체국을 찾아갔으나 해방 이후 어지러운 상황으로 적금을 찾지 못했다는 것.

"할아버지는 그러나 언젠가는 원금을 찾을 것이라는 기대로 통장을 간직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81년 돌아가셨다" 고 말하는 孫씨는 그 통장이 아버지(92년 작고)와 할머니를 거쳐 내게까지 오게 된 것" 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소원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孫씨는 통장발견 뒤 여러차례 담당기관을 찾았다.

황간우체국을 방문하기도 했고, 부산 체신청을 찾기도 했다. 일본 총영사관도 가보았고 외무부도 방문했다. 그러나 대답은 우리는 모르겠으니 다른 곳으로 가보라" 라는 얘기뿐이었다.

孫씨는 "국민이 국가기관인 우체국에 적금한 것을 어째서 못찾는지 모르겠다" 며 "일본 정부는 차치하고 1백년의 역사를 가진 우체국이 일제 36년 공백기를 모르는 척하는데 할 말이 없다" 고 탄식했다.

이원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