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유주열] 화신과 푸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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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서 탐관오리의 오명을 쓰고 있는 인물이 청대 건륭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호부(재무)대신 화신(和珅)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건륭황제로부터 지나친 총애를 받았고 그래서 신하로서 금도를 어겨 왕부에서나 볼 수있는 저택을 소유하고 황실정원에 버금가는 별장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황태자(嘉慶帝)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의 시기심을 촉발하였으나 황제가 살아 있을 때는 도리가 없었다. 건륭황제가 죽자 嘉慶帝는 그를 체포 재산을 모두 압수해 버리고 자살케 한다. 그가 빼앗긴 저택이 청말 최고의 권력을 가진 공친왕의 저택이였던 지금의 공왕푸이며 그의 호화로운 별장의 일부가 지금의 베이징대학의 캠퍼스로 되어 있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50km 떨어진 곳에 “보 르 비콩트‘라는 城(사토)이 있다. 17세기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 성을 지은 사람은 재무상 푸케(N. Fouquet)였다. 그는 당시 어린 루이14세를 대신하여 왕태후와공동 섭정했던 총리대신 마자랭(J.Mazarin)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불과 5세에 왕이 된 루이14세는 어머니와 마자랭의 섭정하에 왕권이 극도로 취약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 속에는 늙은 마자랭과 푸케가 있었다. 그러나 왕이지만 실권이 없는 어린 루이 14세는 때를 기다렸다.
1661년 3월 60세의 마자랭이 죽자 그의 권력은 푸케가 이어 받게 되었다. 푸케는 그해 8월 무더운 파리를 피해 자신의 城에 루이 왕을 초청 그의 권력을 과시하듯 거대한 파티를 열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콜베르(J.Colbert)와 짜고 이 날을 푸케를 실각시키는 날로 잡았다. 파티가 시작한 후 얼마 있지않아 국왕은 각본대로 왕궁을 무색케한 城에서 왕실파티를 능가하는 호화 파티에 화를 크게 내고 성을 떠났다. 그리고 공금횡령의 죄목으로 푸케를 체포케 하였다. 그의 전 재산은 몰수되고 본인은 종신형으로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된다. 국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푸케의 城보다 크고 아름다운 베르사이유 궁을 짓도록 지시한다. 한 때 화신의 별장을 작은 이화원으로 부르듯 푸케의 아름다운 城은 지금도 쁘띠(小) 베르사이유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유주열 전 베이징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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